한국 최고의 셀러브리티 지은서와 유상현.
그 두 사람 사이의 숨겨진 아들 환.
그 세 사람 사이에 애매모호하게 끼어 있는 나.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유상현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몇 분 전 유상현에게 느껴버린 감정이 내게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자님의 공주님이 되는 건 어렸을 때부터 줄곧 바라왔던 바다. 신분, 재산, 지위 등에 있어 내 쪽이 한참 기운다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왕자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얼마든지 극복하고 행복한 프린세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절대 미모, 절대 권력을 지닌 이웃 나라 공주, 게다가 그 사이에 아들까지 있는 왕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상대를 패배감에 빠져들게 하는 완벽한 공주님, 그리고 과거라고는 하지만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왕자는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다. 그러한 왕자를 사랑했다가는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드르륵, 문자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핸드폰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여전히 내 왼쪽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버린 유상현 때문에 멈칫했다. 한편으로는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어정쩡하게나마 내 어깨에서 재워주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환이와 지은서 이야기를 하며 어딘가 씁쓸해 보였던 그의 표정이 생각났다. 나는 자세를 최대한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있는 힘껏 손을 뻗어 가방에서 핸드폰을 빼냈다. 환이였다.
-어디예요? 올 때 순대랑 떡볶이랑 콜라랑 사올 수 있어요?^-^-
환의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생생히 그려졌다. 괜스레 마음이 짠했다. 그래, 집에 가자. 가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 떡볶이, 순대, 콜라를 왕창 사는 거야. 같이 맛있게 먹고 나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너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아마도, 이제 내겐 각국의 왕자님께 무턱대고 편지를 보내던 무모함, 당당함, 순수함 따위는 사라졌나 보다. 승산 없는 게임은 하지 말라고, 상대를 봐가면서 게임을 시작하라고 누누이 알려주는 세상 아닌가. 상대가 ‘지은서’라니. 누가 봐도 승률 제로인 게임이다.
유상현이 깨지 않도록 나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내 어깨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머리의 위치를 내 어깨 대신 푹신한 소파 등받이로 천천히 옮겼다. 그때, 소파의 가죽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는 사람마냥 깜짝 놀란 나는 그가 그 소리에 깨지 않도록 숨조차 잠시 멈춘 후 천천히 엉덩이를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휴, 한숨을 내쉬곤 가방을 애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어깨에 걸쳐 멨다. 테이블 위에는 꽃과 프라다 곽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잠시, '선물인데 들고 가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뇌물이니까 안 되겠지?'로 결론지었다.
프라다에 대한 미련, 궁금증 그보다 더 큰 유상현에 대한 애틋함, 미련 등을 전부 이곳에 남겨둔 채 떠나야지. 그리고, 내일 불쌍한 나를 위해 선물을 사주는 거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가방에 대한 미련은 가방으로 풀고, 남자에 대한 욕망은 남자로 푸는 거야.
구찌든 루이비통이든 샤넬이든… 아, 프라다가 좋겠다. 12개월 할부로 구입하고 12개월 동안 스타벅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지 말자. 돈도 절약되고, 칼로리 섭취량도 줄이고 일석이조다. 아, 남자도 찾아야지. 물 좋은 헬스클럽에 다니고, 높은 클래스의 토플이나 토익 학원에 등록해야지. 아이비리그 학생들이 모이는 비밀 클럽 정보를 빼내어 참석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아, 인맥 넓은 변태지한테 주위의 괜찮은 남자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할까? 평범하지 못한 이유로 이별을 고한 전 여자 친구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냐? 위자료 로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들떠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더니 홱 낚아 채 버렸다. 무게중심은 금세 무너졌고 난 나를 이끄는 방향 쪽으로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풀썩. 소파 전체가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울렁증이 일었다. 눈을 떠보니, 유상현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내 어깨가 유상현의 어깨와 맞닿아 있었고, 내 오른손을 유상현의 왼손이 잡고 있었다. 머리가 살짝 흘러내린 유상현의 이마에는 자그마한 상처가 있었다. 언젠가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 인터넷판에서 본 기사가 불쑥 떠올랐다.
얼굴에 작은 흉터가 있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의 입술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강렬했다. 쉴 새 없이 요동치는 내 심장박동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하는 걱정도 잠시, 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뜨거운 숨결은 서서히 거칠어져 결국은 탄식이 되었다. 아슬아슬한 자세는 결국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소파에서 떨어뜨렸다. 욱신한 충격이 온몸으로 예민하게 전해졌지만 우린 전혀 개의치 않고 서로에게 섬세히 엉겨들었다. 난 두 눈을 감고 그에게 속으로 물었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
갑작스럽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상현과의 모든 건 절대 평범하지 않았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모두 갑작스러웠고, 그 어느 것 하나 순탄한 것은 없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그랬으니까.
이 사람이 새삼 근사한 남자구나, 하는 걸 깨닫다가도 어수룩하고 허술한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하고, 또 여전히 뻔뻔하고 안하무인 같은 모습에 혀를 끌끌 차다가도 애잔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모습에는 마음이 아팠고, 천진한 아이처럼 웃는 모습에 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이 사람을 더는 속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여인의 향기>의 알 팔치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멋있었지만 그래서 솔직히 욕심도 났지만 ‘지은서’라는 절대적인 존재 때문에 모든 걸 접고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려던 나를 잡았고, 갑작스러웠지만 부드럽고 강렬한 키스에 마치 백설공주가 삼킨 사과 조각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꾹꾹 눌러 삼켰던 욕심이 튀어 올랐다. 나 정말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
그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너 사랑해도 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