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를 보며 슬쩍 웃었다. 그리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거만한 포즈와 잘난 척 가득한 표정을 하곤 예전에 외웠던 문장 그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영어로 말이다.
“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만일 당신이 실수를 해 스텝이 엉킨다면 그때부터 탱고는 시작되는 거예요.”
수백 번을 반복해서 외웠던 그 문장을 오랜만에 입 밖으로 흘러내는 순간, 그 문장의 의미가 새로이 다가왔다. 그 시절, 그때는 단지 그 말 그대로로 받아들였다. '아, 스텝이 꼬이면서 옮겨진 발걸음에 의해 탱고가 시작되는 거구나'라고. 한마디로 직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살면서 여태껏 실수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후회와 한숨 한 번 내뱉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할 수 없겠구나. 그렇게 실수하고, 해결하고, 깨달아가고, 또 실수하는 과정에서 하나둘씩 인생을 배우고, 진짜 인생을 살게 되는 거구나.‘
하지만 ‘그럼 난?’이라는 나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질문이 문득 들었을 때, 유상현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가 알파치노 역할로, 그러니까 원래 내 역할로 돌아와도 되는 거지? 물론 그보다 내가 백 배는 더 멋지지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상현은 고갯짓으로, 표정으로 '어서'라고 말했다. 난 꿀꺽 침을 삼키고는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그의 손 위에 올렸다. 우리는 리듬과 어울리게 나는 사뿐히, 그는 무게감 있게 서로의 발걸음을 맞추어 무대 중앙, 아니 거실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그가 내 왼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위에 올렸고, 자신의 왼손을 내 오른쪽 허리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움찔하자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왜, 탱고 추자며. 저번처럼 발 밟진 않을 거라고 믿어."
그가 말을 마친 그 순간, 감미로울 멜로디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더니 매혹적인, 격정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멜로디는 금세 거실 안을, 우리들을 열정으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리듬에 맞추어 그가 홱 나를 뒤로 밀어냈다가 다시 힘 있게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 앉았다. 머리칼이 흩날리며, 환희에 찬 숨소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의 빨라진 숨소리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가늘지만 큰 손은 흔들림 없이 나를 잡아주고 있었고, 내 왼손과 맞잡은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우리는 점점 탱고에 빠져들었고, 난 발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치 아찔한 힐을 신은 듯한 느낌으로 스텝을 밟았다.
이 거실이 근사한 레스토랑의 아름다운 홀처럼 느껴졌고,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들이 우리를 위해 혼신을 다해 연주하고 있는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또, 곳곳에 위치한 갖가지 가구들은 부러운 듯 우리를 바라보는 손님들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난 영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음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가 자연스럽게 날 에스코트하고 난 그를 의지한 채 빙빙 돌았다. 그의 오른쪽 다리 위에 내 왼 다리를 살짝 얹자 음악은 마지막 화음을 냈다. 서로의 숨소리가 여과 없이 서로에게 들려왔다. 그를 보고 내가 먼저 싱긋 웃었고 이내 그도 나를 보며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천진한 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한동안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리는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고백하자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와 나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에게 반해버릴 것만 같았다.
"인정해줄게요. 이번엔 당신, 알파치노보다 조금 더 멋있었어요."
나는 손가락을 이용해 ‘조금’을 강조 했다. 그러자 그가 양손으로 내 두 손을 활짝 벌리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이만큼이 아니고?"
"그래요. 이만큼이라고 해두죠 뭐."
내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너도 도나보다 못하진 않았어. 그럭저럭 봐줄 만했으니까."
난 그의 마지막 말에 살짝 눈을 흘겼지만 그 말이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 원샷을 했다. 몇 잔을 더 들이키고 나자 그가 살짝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참 재밌어."
"…"
"아마, 환이도 그럴 거야. 분명 그 녀석도 널 재미있어 했을 거야. 심심하지 않아. 너랑 있으면."
"…네?"
이런, 이 사람 취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이런 발언을 할 리가 없다.
그가 몸을 비틀더니 살짝 내 곁으로 다가와 한 쪽 손을 들어 내 머리로 가져왔다. 그리고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니 머리카락 왜 이렇게 가늘어? 힘이 없는 건가?"
대체 왜 머릿결이 ‘부드럽다, 비단 같다’라는 아름다운 표현들을 놔두고 이런 멋대가리 없는 표현을 하는 거지? 숱하게 드라마에서 읊조리고 행했던 한없이 유치하지만 더없이 달콤한 행동과 대사들은 촬영 직후 바로 까먹어버린 게 분명했다.
왜 하필 그런 말들밖에 하지 못하는 거냐고 툴툴대기 위해 유상현을 바라보는데, 역시나 나를 보고 있는 유상현의 눈과 마주쳐버렸다. 나도 취한 거가? 왜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하냐고 투덜대던 말이 쏘옥 들어가버릴 만큼 멋있었다. 투덜거림 대신 들려온 건 두근, 하는 내 심장 소리였다.
그가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 눈 바로 앞에 한국, 일본의 여자들이 안기고 싶은 남자 1위가 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이러다 심장마비로 죽을 것만 같았다. 환이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그는… 풀썩, 내 어깨위로 쓰러졌다. 내가 당황해 움찔하자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내 어깨 위에 기댄 채 거친 숨을 힘겹게 내쉬며 소곤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잠시만. 나 지금 죽을 것 같아."
순간 떠올랐다. 환이가 알려준 유상현의 백 가지 비밀 중 하나.
"유상현 술에 엄청 약해요. 센 척하는데 집에만 오면 바로 픽, 쓰러진다니까요?"
고요한 적막 속에서 내 어깨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유상현의 심장 소리. 나의 두근거림. 그 둘만이 차분하게, 하지만 부산스럽게 자리 잡았다. 황홀한 지옥에 있는 듯한 그런 묘한 기분이었다. 아까 느꼈던 그에게 반해버릴 것만 같았던 그 기분이 정확히 들어맞은 걸까? 아무래도 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상현이 그 상태 그대로 힘겹게 말했다.
"지은서야. 그 여자."
지은서?
왜 갑자기 지은서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묻지 않고, 나는 말없이 유상현의 마지막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리고 직감 비슷한 게 왔다. 밑도 끝도 없이 지은서의 이름을 말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지은서.
한국에서는 프린세스 은서, 중국에선 따오밍스 은서, 일본에선 은서히메라고 불리며 만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셀러브리티 지은서? '플러스 텐'에서 단독 인터뷰를 따려 그토록 노력했지만 항상 단칼에 거절하는 그 지은서? 스르륵, 팔에 힘이 풀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