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이 말한 비장의 카드는 분명 '이것'이다. 다른 더 큰 무언가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유상현이 자신과 3촌 관계의 삼촌이 아니라, 1촌 관계인 아빠라는 것! 그러니까 한류스타 유상현에게 숨겨진, 아니 숨겨놓은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 만약, 이것이 언론에 노출된다면 그 파장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홍콩까지 미칠 것이 분명하다. 금세 끓었다 금세 수그러드는 그런 종류의 것도 아니다. 사건은 손과 발, 입과 귀, 심지어 날개까지 달린 가상의 생물체로 변신해 훨훨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어깨 위에 심심풀이 땅콩, 씹을 거리, 궁금증 등을 사뿐히 놓고 갈 것이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다른 큰 사건들이 순식간에 묻힐지도. 또 누군가는 그런 습성을 이용할지도.
인터넷에 쉴 새 없이 업데이트되는 기사들. 한 기사당 수천 개씩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달리는 댓글들. 자기네들끼리의 의미 없는 공방. 마녀 사냥. 유상현, 이미지 실추. 기자 회견. 하지만 끊이지 않는 악플러들의 공격. 각종 CF, 영화, 드라마 계약 해지. 어마어마한 액수의 위약금. 주식 대폭락.
끔찍했다. 나와 키스를 나눈 사랑스런 어린 한 남자와, 지금 와인의 맛을 함께 느끼고 있는 근사한 이 남자. ‘둘‘에게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온다는 게 싫었다.
인터넷 확산은, 작은 약점 하나로 사람 한 명을 끝없이 추락시키는 무서운 세상을 만들었다. 특히나 전파를 타는 방송인들에게 인터넷은 더더욱 공포의 대상이다. 데뷔하기 전 어린 객기에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스타가 된 후 들춰내져 세상을 들쑤셔 어린 스타를 지옥의 세계로 몰고 가고, 방송 도중 살짝 튀어나온 실수의 여지가 있는 말들이 온갖 재해석을 거쳐 어처구니없는 뜻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걸 보면 의무교육 시절에 교육받은 '시의 해석'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지금껏 내가 해왔던 파파라치 짓이나 가십거리 짜깁기 기사들이 부끄러워졌다.
연예인도 사람이다. 말실수를 할 수도, 욕을 할 수도, 길 가던 사람과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리고 실수를 해서 어린 나이에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셀러브리티‘라는 타이틀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환이가 어디까지 말했어?"
그제서야 빈 와인 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유상현이 물었다. 나는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상념들의 증식을 잠시 중단시켰다. 그래, 그는 내가 이 모든 걸 '환'이한테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냥 유상현 씨가 청국장을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고 슈렉을 재미있게 봤고, 뭐 이런 것 들밖에 말 안 했는데요?’
라고 솔직담백하게 큰소리로 떠들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까? 하지만, 불가능했다. 난 남의 차를 들이받을 만큼 어이없고, 남을 떠보고 속일 만큼 황당하고 못돼 처먹은 사람이지만, 내 잘못을 떳떳이 고백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못 되었다. 한마디로 거지 같은 인간이다.
카오스, 즉 혼돈 상태가 지속되었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와인 병을 들었다. 그리고 유상현과 내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쪼르르, 소리를 내며 투명한 액체가 유리잔 안으로 흘러들어갔고 유상현은 금세 잔을 비웠다. 차라리 저 와인이 되어 이곳에서 홀홀히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뭐, 그냥 이 정도요."
난 에둘러 말했다. 유상현은 크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거린 후, 남은 이야기들을 마저 해주었다.
그 아이가 환이라는 것.
지금껏 자신을 삼촌이라 생각하고 자라왔다는 것.
그리고 정말 우연스럽게 나와 사고가 있던 다음 날 아침, 환이가 그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
환이가 말한 그날의 큰 사건이란 자신의 친아빠의 존재를 알아버렸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삼촌이라 불렀던 남자가 어느 날 자신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 충격이 어땠을까. 환이의 상처가 고스란히 가슴 가득 전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둘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 여자가 환이 앞에 나타나고 싶어해."
"그 여자요?"
"응. 17년이나 지난 이제야 뻔뻔하게도 환이를 보고 싶다더군. 그래서 갑작스럽게 일본에 다녀온 거야."
그… 여자가 누구길래…
유상현이 다시 한 번 와인을 들이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널 정말 믿고 너에게 부탁해도 되는 걸까?"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거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니라는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바동거릴수록 더욱 깊은 곳으로 날 삼켜버리는.
"환이는 어때? 잘 지내?"
유상현의 눈빛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 지가 않았다. 환이의 아빠가 유상현이라니. 유상현이 금세 깔깔대고 웃으며 '뻥인데, 속았지?'라며 서프라이즈를 외칠 것만 같았다. 유상현은 다시 한 번 와인 잔을 입술에 갖다 댔다. 그의 입술을 보는데 불현듯, 환이와 키스를 했던 그날 밤이, 환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난 지금 내가 키스한 상대의 아빠와 함께 있는 거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쪽이 한 번 물어봐줄래?"
"네?"
"그 여자, 아니 환의 엄마를 만날 의향이 있는 지. 그 자식 나랑 평생 안 볼 것처럼 하고 나갔거든."
"…"
"아니면 환이와 한번 만나게 해줘."
난 아직 유상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텁텁한 입을 달래느라 계속해서 홀짝 댄 술기운으로 더욱 더 얼굴에 열이 오르며 새빨개졌다. 그 바람에 와인 잔이 바닥나버렸고 계속해서 입 안은 서걱서걱 거렸다. 목을 축이기 위해 와인 병으로 손을 뻗어 와인 병을 잡는 그 순간 난 적잖이 당황했다. 마침, 와인 병으로 손을 옮기던 유상현의 손과 자연스레 포개져버린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고스란히 느끼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빼내어 제 위치로 가져갔다. 침묵이 흘렀다. 하얏트 호텔에서의 뻔뻔함과 당당함은 어디로 숨었는지, 유상현도 적잖아 당황한 눈치였다. 난 애꿎은 머리를 긁적대며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허리를 꼿꼿이 피는 시늉을 했다. 게다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도 훑어냈다. 그거로도 모자라 소파에서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내 몹쓸 엉덩이가 소파 구석에 자리 잡은 리모컨을 건드렸다. 전원 버튼이 눌러졌는지 오디오가 켜지는 멜로디와 함께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 거려보니 텔레비전 옆에 큼지막한 bang & olufsen 오디오가 자태를 뽐내며 자리하고 있었다. 서둘러 손을 뒤적거려 리모컨을 집어 들고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데 유상현이,
"왜? 와인이랑 어울리는 음악인데"
라며 내 손에 들린 리모컨을 빼앗아 들었다. 하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와해시켜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오디오에서 지그시 흘러 이 거실 안을 포근히 감싸 안은 음악은 '탱고'였다.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가 도나에게 탱고를 추자며 매혹적인 말들을 근사하게 늘어놓는 그 장면. 수도 없이 되감기로 돌려봤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내게 왕자 같은 근사한 남자가 손을 내밀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며 굳게 믿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사도, 탱고의 스텝도 모조리 외웠었다.
곧, 감미로운 전주가 끝나면 격정적인 멜로디가 이 거실 안을 새빨갛게, 열정적으로 가득 메울 것이다. 술기운이 올라옴과 동시에 장난기도 살짝 발동되었다. 사실, 잠시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쓸쓸해 보이는 이 남자에게 살짝이나마, 잠시나마 웃음을 주고 싶었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상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상현은 살포시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뭔데?"
"탱고를 배우고 싶지 않나요?"
유상현은 약 2초 후,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지금이요?"
유상현이 말했다. 이번엔 내가 웃음이 나왔다. 혹시, 그도 이 영화의 대사를 기억하는 것인가? 그는 타이타닉과 슈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쨌거나, 난 다음 대사를 이어 말했다.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무료로요. 어때요?"
"조금 걱정인데요?"
이런, 그도 대사를 완벽히 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가요?"
"그쪽이 밟을 밟을까 봐, 아니 제가 실수를 할까 봐서요."
조금 전의 앞 대사만 삭제시킨다면, 지금까지 그는 여인의 향기 도나의 대사, 난 알파치노의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나는 이 장난이 잠깐 동안의 도피처로 시작된 것을 잠시 잊은 채 이 상황에 심취해버렸다.
“탱고는 실수할 거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탱고는 정말 멋진 거예요.”
그가 장난기 그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서 빨리 다음 대사를 외워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