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이.엄.마?
유상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환이 엄마'라는 단어보다, 그 단어를 내뱉는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묘한 표정들이 마음속 한가운데 쿡, 하고 박혀버렸다. 안타까움, 쓸쓸함, 후회, 미련…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지나간 그 '무언가'에 대한 미안함. 어쩌면, 언어가 없었던! 하지만 인간사가 존재했던 그 옛 시절, 사랑을 하고 배신을 하고 이별을 하는 그 모든 순간에는 절대적으로 상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대신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만큼 크게 다가왔다. 일순간 보여준 유상현의 표정이.
‘모든 걸 가졌기에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선택받은 이 사람에게도 이런 감정들이 존재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작스레 그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내가 아는 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유상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와인 가지고 올게."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걸어 나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와인 좋아… 하나?"
왜일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몇 걸음 안 가서 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물었다.
"화이트 와인? 아님, 레드와인?"
어떻게 대답해야 그에게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보일 수 있을까 곰곰이 고민을 하다 내가 내뱉은 말은 왜일까, 고작 이거였다.
"달달한 거요."
이해한다는 듯 깔끔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유상현은 내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 난 내가 내뱉은 '달달한'이라는 유치한 발언에 후회함과 동시에 어째서 그 순간 그에게 가짜인 나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곧, 유상현이 화이트 와인과 와인 잔 두 개, 아까 먹다 남은 청국장 뚝배기를 쟁반에 받쳐왔다. 흔들흔들, 서빙 하는 자세도 불안스러웠지만 과연 저 둘의 조합이 어떨까가 더욱 불안했다.
달달한 와인을 홀짝거린 후 청국장에 쫄릴 대로 쫄린 두부를 포크로 콕 찍어 입 안에 넣었다. 화이트 와인의 달콤함, 쌉싸래함, 옅은 텁텁함. 하지만 그래도 술인지라 약간 느껴지는 알코올의 향과 짭조름한 간이 고슬고슬 베인, 몽글몽글 금세라도 뭉개질 것 같은 두부는 의외로 환상의 궁합이었다. 살다보면 부조화로 느껴지는 어떤 것들이 합쳐져 조화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콩국수와 설탕. 생 멜론과 햄. 청국장 속에 든 두부와 화이트 와인. 그리고… 한류스타 유상현과 그들을 파파라치 하는 직업을 가진 나…? 뜬금없는 생각에 당황해버린 나는 도리질을 쳐 재빨리 잡념들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버렸다.
"어릴 때 만났어."
와인 잔을 돌돌 돌리며 그가 고백하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와인 잔 안의 와인은 조용히 소용돌이쳤고, 난 그의 고백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연예인을 준비하는 연습생이었고, 난 멋모르는 고등학생이었어. 여기저기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수도 없이 당했지만 딱히 연예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귀찮아 보였거든. 어쨌든, 장난삼아 간 연습실에서 그녀를 만났고, 간간히 그녀와 데이트를 했어. 설렘과 긴장이 동반된 나름의 첫사랑이었지."
그의 첫사랑 고백인가? 하지만 그게 환이 아니, 환이 엄마와 무슨 상관이람?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떤 여자 이야기를 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어째서 나에게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얼른 묻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 같았지만 그의 고백 같은 이야기를 눈치 없게 싹둑 끊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와인을 넘기는 소리만이 내가 그에게 하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생 내가 모르고 살았던, 아니 몰랐으면 좋았을 것 같은 사실을 알게 됐어. 내 친아빠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데 그게 엄청난 인간이더라고. 아, 이미 환이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너한테 캐리 팍스 사진 찍어달라고 고용한 그 인간이 내 친아버지래. 그 노망난 영감탱이. 이제 와서 어쩌자고 그러는지. 암튼, 그건 넘어가고."
그가 잠시 말과, 와인 잔 돌리기를 멈추고 반쯤 차 있는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난 와인을 삼키지도 않았는데 꼴깍 하고 침이 넘어갔다. 이쯤 되니 차곡차곡, 어느새 목구멍까지 쌓여버린 죄책감에 ‘사실, 나 그 이야기들 하나도 몰라요. 당신을 속인 거예요’라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에게 미움, 경멸 등등을 받고 싶지 않다는 정체모를 이상한 마음에서였다.
"엄청나게 배신감이 들더라고. 꼭지가 돌아버렸지. 당연히 어린 객기에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시고 그렇게 그날 아무 준비 없이 그녀와 자게 됐어. 아이가 생긴 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을 만큼 뒤늦게야 알았고, 낳게 됐어. 꼬물꼬물한 그 아일 보면서 무서우면서도 신기하더라? 콧날과 입술은 꼭 나를 닮고 눈이랑 피부색은 그녀를 닮았었어. 당연히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에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설픈 프러포즈를 했지만 그녀는 나와 생각이 달랐어. 갑작스레 들어온 드라마 주연 제의에 아이대신 배우를 택했지. 아이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고."
어렴풋이, 환의 얼굴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나에게 키스했던 환이의 입술은 유상현처럼 새빨갰고 콧날 또한 유상현과 닮아 오뚝하고 이기적이었다.
설마…
"고민 고민하다 엄마에게 말을 꺼냈지. 속으로는 걱정하면서 겉으로는 당신도 날 그렇게 낳지 않았냐, 그렇게 엄마의 상처를 긁어가며 내 실수를 정당화했어. 엄마가 의외로 담담하더라고. 그리고 다음날, 엄마 동생 그러니까 내 이모 호적에 넣자고 하더라고. 어차피 이모는 아이를 못 낳는다고."
맙소사.
이제야 확실해졌다. 그가 나에게 하고 있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환, 환의 엄마인 그 누군가! 그리고 환의 아빠이면서 지금 내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며 고백을 하고 있는 유상현의 이야기였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내 그런 감정선들을 그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아니,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절.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