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일 때, 가장 중요한 것들 중 첫번째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두번째는 내가 상대의 비밀을 안다는 것을 그가 눈치 채지 못 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난 마음속 깊이 유상현에게 '미안해요. 이용할게요‘—이용이 될 진 모르겠지만—라고 상대가 듣지도 못 하는 사과를 정.중.히 했다.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상현을 바라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평소에 뭐 시켜 드시는데요?"
"배달되는 거."
유상현은 어디선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들고 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헤이즐넛 향이 조용히, 하지만 깊게 풍겼다. '당연히, 배달되는 걸 시켜먹겠지. 그리고 그걸 혼자 먹냐?' 난 유상현을 흘깃 째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폭신한 소파 앞으로 가 엉덩이를 내려놓기 전에 유상현에게 양해를 구했다.
"앉을게요."
라고. 그 즉시 유상현은 '얘가 미쳤나?'라는 생각을 담은 해괴망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하얏트에서의 일, 기억 안 나? 뭘 그런 걸 물어?"
안 날 리가 있나. 단지, 난 쉬운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형식적인 양해를 구한 것뿐이다. 그게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난 고맙다는 표현으로 상냥한 미소를 그에게 보낸 다음 나름 우아한 포즈로 소파에 앉았다. 털썩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사뿐히. 유상현이 계속해서 날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근데, 해먹기도 해요?"
"당연하지."
"아, 요리 잘한다는 이야긴 기사에서 종종 본 적 있어요. 올리브 스파게티, 엔초비 파스타, 야채 베이컨 파스타 등등. 스파게티 종류는 다~ 잘 만든다고."
유상현이 헤이즐넛을 홀짝 거리며 소파에 기대 선 채 나를 바라봤다. '뭐, 너도 여느 여자들과 같이 그런 걸 좋아하는구나' 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며 뿌듯해하는 뭇 남자들의 그런 표정이었다.
"만들어줘? 사실 파스타 쉽거든. 파스타를 끓는 물에 넣고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면 절반은 완성인 셈이니까."
살짝 우쭐하기 까지 한 유상현은 묻지도 않은 스파게티 레시피를 줄줄 읊어댔다. 대부분 우린 좋아하는 음식의 레시피를 떠올릴 때 그 음식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한 번쯤은 꼴깍, 자기도 모르게 침이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유상현은 그 두 가지 모두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스파게티는 유상현이 사랑하는 음식이 아니라 여자를 꾈 때 이용되는 일종의 낚시 도구 중 하나인 셈이었다.
"아니요. 전 별로 스파게티 안 좋아해요."
"그럼 뭘 좋아하는데?"
유상현은 내심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 한식 좋아해요."
"어떤 한식?"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처음부터 청국장이란 단어를 내뱉으면 안 된다는 거다. 내가 환이와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그가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너무나도 쉽게 청국장! 이라고 직구를 던졌다가는 ‘환이가 알려주기라도 했나 보군’이라는 시니컬한 반응만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김치찌개. 계란말이. 된장찌개. 두부찌개. 아,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건……."
잠시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궁금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공유의 감정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선 조금 더 대화의 기술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난 음식에 관련된 이것저것을 더 물었고 유상현은 툭툭 뱉긴 했지만 나름 성심성의껏 답해줬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갈 때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가? 아무튼 전 한식 좋아해요. 그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비밀인데요……. 청국장이에요."
"청국장?"
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리곤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난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청국장이요. 아빠가 제일 좋아하시던 음식이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엄마가 자주 해주는 음식이었고 또 당연히 가장 많이 접하는 음식이 됐고요."
사실이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사실은 난 그 냄새를 싫어했었다. 청국장을 먹으면 하루 종일 온 몸 곳곳에서 그 고소하면서도 눅눅한 냄새를 조금씩 방출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 마음에 공주, 셀러브리티들은 절대 이런 음식을 먹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쓱쓱 밥 비벼 먹으면 최고잖아요. 옆에 풋고추 하나 곁들여도 좋고요."
난 유상현의 눈치를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유상현이 발걸음을 옮겨 소파 쪽으로 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싫어하죠? 그런 음식?"
난 몸을 살짝 틀어 유상현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래서 조금은 창피하고 걱정된다는 듯한 얼굴로 천진하게 물었다. 물론 그 얼굴의 바닥에는 유상현의 반응을 즐겨보자는 다소 사악한 얼굴이 있었을 게 뻔했다.
"아니, 싫어하는 건 아니고……."
유상현의 목젖이 불끈 솟아올랐다 내려갔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다소 당황했는지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 겨우 ‘청국장’에 저런 반응인데 뭔가 더 큰 비밀을 둘러치듯 말했다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내심 궁금해졌지만, 악마의 얼굴을 오프 시키고는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럼 좋아해요?"
"뭐, 먹을 줄은 알아."
"그럼, 제가 해드릴까요? 엄마 덕분에 진짜 맛있게 끓일 줄 알거든요."
뻥이다.
하지만, 끓이는 걸 자주 보긴 했다. 그리고 어제 환이의 말을 듣고 네이버 지식인에 ‘청국장 조리법’이라고 쳤고 과정을 찍어둔 사진이 빽빽하게 올라와 있는 블로그에 들어가 레시피를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해두었다.
"멸치랑, 다시마랑, 표고버섯, 신 김치, 마늘, 고춧가루, 그리고 청국장 있죠?"
유상현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신의 그런 행동에 나보다 자기가 더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좋아하시거든. 그래서 재료는 있을 거야."
"그래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툭툭 털며 자신 있게 씨-익 웃었다. 너무 좋아하다 못해 환장할 정도니까 청국장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늘 해둔다는 환이의 제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를 유상현 앞에서 티를 낼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나름, 메뉴가 청국장으로 거의 결정된 것이 좋아서 안면 붕괴 직전이면서 끝까지 도도하고 시크한 자세를 유지하려는 상현을 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청국장 해줄게요. 이야기는 저녁 먹으면서 해요."
"이건? 선물은 안 풀어보나?"
"그거요? 나중에 풀어보죠, 뭐.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난 쿨 하게 웃으며 부엌이 어디냐고 물었고 유상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드라마에서 나올 만한, 부엌이라는단어보다 키친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장소에 날 안내했다. 유상현이 나를 보는 눈빛이 내가 생각건대 약간 달라져 있는 듯했다. 암, 그럼. 난 남의 집 소파에도 털썩털썩 쉽게 앉지 않았고, 선물에 눈이 먼 여자들처럼 게걸스럽게 선물 곽을 열어보지도 않았으며, 그가 제일 좋아라 하는 청국장을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자신 있는 요리라고 말했으니까.
약 삼십 분 후, 식탁에는 고슬고슬한 밥이 담긴 공기 두 개과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 냉장고에서 대충 꺼낸 밑반찬들, 그리고 유상현이 가지고 온 와인 두 잔이 소박하게 놓여졌다.
유상현은 자리에 앉고도 잠시 청국장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이거 정말 니가 한 거 맞아?’, ‘그건 둘째 치고 이상한 거 넣은 건 아니겠지?’ 등, 수많은 질문을 눈으로 내뱉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눈망울로 ‘왜 드시지 않으세요? 어서 드셔보세요’라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유상현은 영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고 내가 끓인 청국장의 맛을 봤다. 그리고 한층 더 아리송해진 표정으로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한 숟가락 더 맛을 봤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너…… 여기다 뭐 넣었어?"
라고, 취조하듯 물었다. 맛이 이상한가? 분명 레시피대로 했는데!!!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재료와 순서들을 빠짐없이 체크하며 외웠는데.
"왜요? 맛이 없어요?"
슬슬 걱정이 된 나는 숟가락을 들고 조금 맛을 보았다.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엄마가 끓여준 그 맛과 얼추 비슷하기는 했다. 제대로 처음 끓여본 것치고는 썩 괜찮은 정도인 것 같은데 유상현에게는 맞지 않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니, 엄청 맛있어. 그래서 뭘 넣었나 궁금해서."
그는 아이처럼 씨익 웃더니 밥에 청국장을 쓱쓱 비벼 맛깔스럽게 먹었다. 그런 유상현의 새삼스런 모습에 풋,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막았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신 김치를 숭숭 썰어 청국장과 같이 양념한 것뿐이에요."
엄마가 자주했던 요리 비법을 읊으며 난 마음 속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어냈다.
"그래? 그렇게 하면 이런 맛이 나는구나."
유상현은 신이 나서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지금껏 보아온 한류 스타 이미지의 유상현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 청국장 한 그릇으로 유상현과 나에게 있었던 두터운 벽이 약간은 허물어진 듯했다. 밥을 먹은 후 자신만 재스민 차를 마시지 않고 나에게도 건넨 것을 보니 분.명 그런 듯했다.
다시 소파에 앉은 우리는 뜨거운 재스민 차의 온기를 느끼며 소화를 시켰다. 유상현이 잠시 찻잔을 내려놓더니 내게 말했다.
"나 일본에서 환이 엄마 만났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