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튼…… 일단, 뭐 좀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배고파 죽겠네."
신호가 빨간색에서 청색으로 바뀌자마자 유상현은 급하게 엑셀을 밟았다. 차는 출발 신호 소리를 들은 달리기 선수처럼 빠른 속도로 정지선과 그 옆의 차들을 앞서나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앞의 신호등에서 또 멈춰서야 하는 상황이 왔다. 가속도가 붙은 차가 급작스레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내 몸은 살짝쿵 앞으로 튕겨졌다. 다행인 건, 안전벨트가 내 머리를 차창 유리에 박지 않도록 막아줬다는 것. 더 다행인 건 내가 튕겨진 그 순간, 장미 다발과 프라다 곽도 함께 덜커덩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지만 바닥으로 낙하하진 않았다는 거다.
휴우, 이 남자는 여자, 꽃, 명품(?)들은 극도로 세심하게 살살 다뤄도 모자란다는 세기의 진리를 모르는 걸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혼자 퉁퉁거리고 있는데, 유상현이 나에게 처음으로 '의견'이란 걸 물었다. 놀라움과 동시에 '감동'이란 감정이 여름철 해파리 떼들의 습격처럼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머릿속엔 먹고 싶은 메뉴를 곰곰이 고민할 만한 크기의 용량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용량 초과는 언제나 버벅 대는 것을 시초로 해 원인 모를 에러로 인한 강제 종료를 발생시킨다. 사람도 컴퓨터와 다를 바 없다. 유상현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아무 거나요."
내가 대답을 했고, 유상현은 예상한 대로 다시 물어보지 않고 여전히 운전에 집중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난 머릿속은 '환이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에둘러 말해야 하나', '유상현이 나에게 부탁할 것이 어떤 종류의 무엇인가'를 고민하느라 바빴고, 온몸 가득 자잘하게 퍼져있는 시신경들은 온통 네모진 프라다 곽 쪽으로 쭉쭉 뻗어 있었다.
사실, '곽'으로 포장된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비로써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명쾌한 진리는 여자들의 영원한 로망은 단연코 '백' 이라는 것.
그러기에, 빅토리아 베컴이 비행기 사고 당시 두 아이보다 에르메스 백을 먼저 챙기는 바람에 세간에 이목을 한 몸에 받고, 평생 동안 들을 욕지 꺼리를 단시간에 과다 섭취했다는 그 생뚱한 기사를 보면서도 선뜻 빅토리아를 힐난하지 못했다.
사실 맞은편에서 자체적으로 광을 내는 멋진 여자가 걸어올 때, 남자들의 시선은 얼굴에서 가슴 그리고 다리로 가겠지만—뭐,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수순은 약간 바뀔지 모르나—여자들의 시선은 전체적인 스타일에서 바로 그녀가 들고 있는 BAG이다. 만약, 그 백마저 자신의 것보다 한 수 우월하거나, 에르메스 버킨이나 켈리 백, 샤넬2.5와 프라다의 나일론 백처럼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런 '백'이라면 부러움을 가득 담은 시선이 오랫동안 그녀에게 머물 것이다. 한마디로, 백은 여자의 적인 여자의 질투 어린 시선을 선물해준다.
* 환율이 폭등하면서 샤넬 백 가격도 같이 폭등해버렸고 결국 중고 백이 처음 구매할 때보다 1.5배 정도 비싸진 그 엄청난 사건.
아, 게다가 돈도 벌게 해준다. 작년에 꽤나 높은 수익률을 낸 펀드 중 하나가 샤넬 펀드*지 않은가.
또 하나! 만약 고가의 '버킨' 백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중에 딸, 며느리나 손녀들에게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깔끔하게 보존한 그 백을 살랑살랑 대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너희 들 중 가장 내 눈에 이뻐 보이는 사람에게 이 백을 선물할거야.’
그녀들은 아마 나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도할 게 분명하다.
잠시, 환과 유상현을 잊은 채 어서 빨리 돈을 벌어 장래를 대비해야겠다는 일종의 '노후 대책(?)'을 구상하고 있는데 유상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
그 소리와 동시에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난 차장 밖으로 펼쳐져 있는 배경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배경은 온통 어두웠다. 차고였다.
난 분명 날 기다려주지 않을 그를 따라 내리기 위해 차 문을 열고선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약 5초간 고민했다.
'꽃과 프라다 곽을 들고 내려야 하나.'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들고 내려."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난 꽃과 곽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차고 밖으로 나가니 200평은 족히 돼 보이는 주택이 있었다. 푸른 식물들이 보기 좋게 곳곳에 자리 잡은 정원에는 바비큐를 구울 수 있는 그릴과 분위기를 내며 식사나 차를 할 수 있는 에스닉한 느낌의 식탁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바람이 살랑거리면 그에 따라 위아래로 느릿하지만 경쾌하게 움직일 것 같은 그네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밟으며 걷고 있는 단아해 보이는 이 돌 계단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비밀의 정원 같은 그곳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돌들을 밟으며 그를 따라갔다.
그가 덜컥 문을 열더니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아마도 내가 잘 따라왔나 확인 차 나를 본 것 같았다. 그가 어서 오라며 오른손으로 까닥거렸다. 그때 비로소 내가 지금 위치한 이 아름다운 곳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류 스타 유상현의 집
딱 한 번, 아침 방송에서 유상현의 집을 공개한 적이 있었다. 누구랑 함께 산다고는 들은 기억이 없다.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크기의 화려하고 근사한 집만이 내 눈을 집중시켰고 보기 싫게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공주님과 왕자님만이 사는 그런 집 같았다.
"들어와."
난 잠시 발걸음을 정지시켰다. 그의 '들어와'라는 말이 '얼음'처럼 들렸다. 난 멀뚱히 멈춰 차렷 자세로 유상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호텔에 이어 집? 더군다나 유상현은 나에게 부탁할 게 있다 했다. 그 부탁은 아직 뭔지 모르나 난 꽃과 프라다—아직 내용물의 정체는 모르지만—라는 뇌물도 받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난 며칠 전 유상현의 조카인 환과 키스를 나누었고 악마의 유혹에 빠져 거래를 했다. 한마디로 유상현은 지금 내가 조심하고 유의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작정 그를 따라 집으로 설레설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 그리고 유상현은 쉬운 여자를 싫어한다고 했다. 뭐, 여느 남자도 다를 바 없겠지만.
"지…… 집에 누구누구 있는데요?"
유상현이 어이없음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환이가 너희 집에 있을 테니 지금은 아무도 없어. 들어가면 너랑 나?"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유상현이 돌계단을 밟고 몇 걸음 걸었다. 그리고 떡 하니 내 앞에 섰다. 규칙적이지 않은 숨소리가 서로에게 들리는, 상대방 얼굴의 잡티가 빤히 보일 만한 그런 가까운 거리였다. 아니, 유상현의 얼굴엔 잡티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나와 달리 긴장하지 않았으니 숨소리조차 잔잔하고 고르다. 나에게 오롯이 불리한 거리였다.
내 상태를 숨기기 위해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 하는 그 순간 유상현이 오른손을 들어 내 왼쪽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그와 더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그가 동그랗게 커져버린 내 눈에 시선을 유지하며 말했다.
"너 내가 나오는 드라마랑 영화 봤지?"
유상현이 물었고 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와 연기했던 그 여자 배우들 봤지? 얼마나 예쁜지. 아, 캐리 팍스도 봤잖아."
이번에도 역시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날 씻으면서 니 얼굴도 보지?"
아니라고 말할 껀덕지가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그의 의도가 파악되었고 또다시 내 고개는 끄덕여졌다.
"오케이?"
"오케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을 조근 거리듯 따라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잘 알아들어줘서 고맙다는 상을 주듯 선뜻 프라다 곽까지 가져가 들었다. 덕분에 내 두 손은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까닥거리며 홱 돌아섰고 난 멈춰 있던 발걸음을 때고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은 가벼웠지만 발걸음 무거웠다.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거실 탁자위에 짐들을 올려놓은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시켜먹을까? 먹고 싶은 거 없어?"
말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뚝뚝 끊겨지는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진심으로 내게 의견을 묻는 느낌이 들었다.
번쩍! 환이가 말해준 유상현의 비밀 중 하나가 떠올랐다.
유상현이 좋아하는 음식.
청.국.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