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자리에 위치한 동료 기자가 자신의 머리의 무게중심을 내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슬쩍 내 핸드폰을 훔쳐보았다. 난 재빠르게 폴더를 닫아 주머니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가 나에게 궁금증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속닥였다.
“누구야? 유상현?”
그뿐 아니라, 나와 핸드폰을 주시하던 모두의 눈동자에도 유.상.현.이라는 세 글자가 콕콕 박혀 있었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내 옆자리의 그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서 아쉬움, 허탈함, 실망감 등등이 드러났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유상현에게 또 한 번의 문자가 왔다.
- 왜 안 나와? -
문자에서 신청하지도 않은 음성 지원이 들리는 듯 유상현의 짜증스런 말투가 귓가에 먹먹하게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공항에서 보낸 문자가 온 지 이미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정해진 퇴근시간도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난 마감과 취재로 허용되는 시간의 자유로움 아닌 자유로움이 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장. 단.점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인터넷을 보니 ‘유상현 귀국’에 대한 기사는 전혀 눈에 띠지 않았다. ‘몰래 귀국’이라는 걸 시도한 게 틀림없었다. 난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후, 남이 보란 듯 일부러 부산스럽게 카메라를 뒤적거리다 밖으로 나갔다.
뒤통수에 무작위로 꽂히는 시선 따윈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싸가지로 점철된 유상현의 문자가 속 깊이 거슬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유상현을 만나 사건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간절함이 그보다 더 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뛰어 나가니, 도로 한쪽 방면에 내가 뒤꽁무니를 박았던 유상현의 차가 멀쩡한 상태로 서 있었다. 도로 정차 중인 주제에 미안함의 표시인 비상등조차 깜빡거리지도 않은 그 차는 주인의 거만함을 쏙 빼닮았다.
난 그래도 신중함을 요하며 짙게 선팅되어 있는 유리창을 통해 그 안을 빠끔히 들여다봤다.
언젠가 겨울이었다. 한강 고수 부지에 갔다 화장실을 살짝 들른 후 후다닥 뛰어 나와, 다시 차로 돌아갔다. 추위에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마자 나의 두 눈의 동공이 하염없이 커져버렸다. 그 차 안에서는 남녀가 서로 뒤엉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물론, 남자는 내 애인이 아니었다. 나를 발견한 그들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급하게 문을 닫은 후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유난히도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에 집게손가락으로 빠르게 ‘미안합니다’라고 쓴 후 급하게 자리를 떴다.
같은 차종, 같은 색의 차라고 방심해서 무작정 문을 열면 안 된다는 교훈을 그때 처음 얻었다. 강렬한 방법으로.
그래서! 그와 같은 뻘쭘한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더군다나, 여름이라 차장이 뿌옇게 김이 서리지도 않는다. 사과할 방법도 없단 말이다—투시라도 하듯 차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덜컥 하고 문이 열리면서 남자의 손이 보였다. 그리고 곧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안 타?”
무미건조함과 차가움, 안하무인 등이 골고루 섞였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나지막한 부드러움이 적절히 배어 있는 유상현의 목소리였다. 그는 몸을 최대한 옆으로 기울여 조수석 문을 열고 있는 상태였다. 난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뭘 그렇게 빤히 들여다 봐? 니가 박은 차도 못 알아봐?”
“이런 차가 어디 한둘이예요?”
“응. 한둘이야.”
빈정대듯 던진 말에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만큼 귀하고 비싼 차라는 거지? 난 속으로 다시 한 번 빈정댄 후 가방을 발밑에 놓고서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유상현을 바라보았다. 여행의 여파로 약간은 파리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멋있었다. 그리고 하얀 셔츠를 거칠게 접어 팔꿈치까지 올린 그가 핸들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왜 여자들은 셔츠를 한 뼘 정도 접어 올린 그들이 거만한 듯 한쪽 손바닥으로 핸들을 돌리는 것에 그렇게나 마음이 기우는 것일까!’
라는, 지난번 8월호 여성 잡지—내가 일하고 싶었던—의 칼럼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던 공감의 한 표를 지금 내던졌다.
“왜?”
유상현이 시선은 앞으로 둔 채 툭 내뱉었다. 그에 뭐라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나는 허리를 숙여 애꿎은 가방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그에게 물어야 할 것들에 대한 우선 순위를 떠올렸다.
대체 왜 그렇게 급작스러운 행동을 한 후 또 더 급작스럽게 떠나야 했나. 그렇다. 이게 우선 순위였다.
“……저기요.”
“뒷좌석 봐봐.”
언제나 그렇듯, 그는 내 말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아마도, 그 누구도 그에게 ‘배려’라는 걸 가르쳐준 적이 없나 보다. 상대를 기다려주고, 상대의 반응을 바라봐주는 그런 최소한의 예의조차 유상현에게는 없어 보였다.
난 생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핑크 장미로 화려하게 엮어진 꽃 한 다발과, 가로세로가 50센티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네모난 박스가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박스에 ‘PRADA’라는, 악마가 즐겨 입는다는 브랜드의 이니셜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니 거야.”
“네?”
내 목소리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어났다.
“환이는 잘 있어?”
“아. 네.… 네? 환이요? 본 지 오래됐는데……."
실수였다.
핑크 장미와 프라다 박스에 넋이 나가버린 데에서 온, 여자라면 저지를 수밖에 없는 프라다라는 타당한 상황과 이유에서 온 엄청난 실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다시 정정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말을 찾기 위해 머리 회전을 하는데 유상현이 다시 한 번 툭 내뱉었다.
“잘 돌봐줘. 니가 마음에 드나본데.”
“네?”
꼴깍, 딸꾹질 비슷한 소리가 목젖에서 울러 퍼졌다.
“그리고, 부탁 하나 할 게 있어. 그러니까, 그 선물은 뇌물로 받아둬.”
마침, 색이 바뀐 신호등에 의해 차가 멈춰 섰다. 유상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진지한 그의 눈빛에 나는 다시 한 번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