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유상현과 관련된 질문 공세에 내가 정한 답변의 법칙은 일단 ‘아직은 잘 몰라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기다려 달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하여, 오늘 아침!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든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발표의 시간을 갖지 않았던가.
유상현이 ‘애.인.’인 나에게 말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일본으로 떠나는 바람에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아직 서로 합의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유상현이 귀국하면 곧바로 합의를 한 후! 내가 월급이라는 위자료(?)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플러스 텐’에서 최초로 인터뷰를 하겠다. 그.러.하.오.니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 입과 귀가 간질거리는 건 이해하지만, 제발! 아주 잠시 동안만 이 일에 대해 침묵을 부탁한다, 고.
하지만 강윤지는 부탁이란 단어를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걸러 들은 모양이었다.
“에이, 연인 사이에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만약, 정말 모른다면…….”
강윤지가 말의 템포를 점점 늦추며 말 끝머리를 의뭉스럽게 뭉뚱그렸다.
“그건…… 둘이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거 아니야?”
순간, 내 눈빛과 강윤지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소리만 들리지 않았지 파지직! 하고 튀어 오르는 서로의 눈빛 전파는 꽤나 강렬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도발했고, 난 알면서도 바보같이 그 도발에 넘어가버렸다.
정신 무장 후 전투 태세 돌입 준비.
“솔직히 좀 이상하잖아. 유상현이 왜 자기랑 만나? 그리고 자긴 변태지 씨랑 사귀었었잖아.”
그 사이 강윤지가 선방을 날려버렸다. 어릴 적 미치도록 궁금해 하던 것들 중 하나가 대체 왜, 요술공주들이 요술지팡이를 요리조리 현란하게 흔들며 변신을 하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악의 무리들이 공격하지 않고 멀뚱히 가만히 있느냐는 것이었다.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단 말이다.
“솔직히 좀 이상하잖아. 유상현이 왜 자기랑 만나? 그리고 자긴 변태지 씨랑 사귀었었잖아.”
“태지 씨랑은 헤어졌어요.”
“갑자기 왜?”
“남녀 사이란 원래 그런 거잖아요?”
탁구 시합을 하듯 탁,탁,탁. 서로의 대화를 맞받아치며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오늘 죽어라 좋다가도, 내일 죽어라 싫어질 수도 있는 묘한 사이. 그런 게 남녀 사이 아닌가요?”
차마 아니, 절대 태지의 커밍아웃 때문이라고 솔직히 고백할 순 없었다. 강윤지가 흔쾌히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만난거야, 유상현?”
“우연히요.”
“어떤 우연? 나 그 우연이 무지하게 궁금해, 자기.”
“당연히 궁금하겠죠. 천하의 유상현과의 만남인데. 꽤~나 로맨틱 했어요.”
난 맨발로 엑셀을 힘차게 밝으며 유상현에게 돌진했던, 뿔 세운 들소 같은 내 모습을 떠올리며 넉살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후, 이번엔 강윤지보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근데 궁금해 하시는 분이 너무 많으셔서요. 제가 제일 먼저 그 근사한 우연을 밝힐 상대가 윤지 씨는 아닌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난 ‘조금만’을 강조해서 말하며, 오른손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야간 벌린 얄미운 제스처까지 보였다. 그리고 승리의 기운에 도취되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데, 윤지 씨는 왜 그날 하얏트에 있었어요?”
“그건 왜?”
“그냥요. 신기한 우연인 것 같아서요. 어떻게 딱 그 날!”
난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고 정말 신기하다는 듯 과장된 몸짓의 향연을 벌였다.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오버스럽게 말이다. 그러자 불안하게도 씨익, 하고 강윤지의 오른쪽 입 꼬리가 한껏 높이 올라갔다. 내가 기대한 반응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강윤지는 오렌지 핑크 립스틱을 꼼꼼히 바른 입술을 천천히 열어 말을 이어갔다.
“자긴, 내가 그날 거기 간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뭐, 우연이 아니면 유상현과 캐리 팍스의 소문…… 때문에? 아하하, 진짜 열심이네요.”
“그것도…… 아닌데?”
그것도…… 아닌데? 라는, 그녀의 말이 메가톤급 펀치로 다가와 내 명치께를 강타했다. 그 펀치의 위력으로 난 금세 무장해제 되어버렸고, 온몸 곳곳에 멍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 거긴 왜?”
애써 나오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한동안 강윤지는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쏘아 보낼 뿐이었다. 얼어붙은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강윤지는 프린트 물을 책상에 대고 탁탁 두드려 가지런히 정리한 후, 다시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을 하느라 몸을 숙인 틈에, 내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자기는 너무 읽기 쉽다. 어쨌거나, 잘 생각해봐.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이현 씨가 유상현의 애인으로 입지를 굳혔음 좋겠어. 그래서 유상현의 비밀도 파헤치고.”
그리고 사뿐사뿐 걸음걸이를 옮겨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당장 그녀를 외진 곳으로 끌고 가 꼬치꼬치 이것저것을 캐물을 생각에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데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를 잽싸게 휘감았다.
“편집장님 긴급 회의요! 지금 바로 회의실로 모이래요.”
편집장의 입에서 날카롭게 흘러나오는, ‘매출 현황이 어떻다느니, 플러스 텐의 라이벌인 잡지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다느니, 한 연예인이 소송을 걸었다느니’라는 말들이 회의실 곳곳을 검붉은 어두운 색으로 물들였지만 그것들은 내 귀에 전혀 자극을 주지 못했다. 간간히 마주치는 강윤지의 눈빛에 내 온 촉수가 쭈뼛쭈뼛 치솟아 오를 뿐이었다. 머릿속은 하얀 스모그로 가득 찬 것 마냥, 먹먹하기만 했다.
우연도 아니다. 캐리 팍스와의 루머 때문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뭔데?
“그럼, 이번 주 안에 기대할 수 있는 건가? 유상현과 백이현의 유백 러브스토리…… 그거에 희망을 걸어야지.”
편집장의 마지막 한마디에, 회의실 안의 스무 개가 넘는 눈동자들이 모조리 나에게 집중되었다. 조금 봐줬으니까, 이해해줬으니까 반드시 말해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들. 그 눈동자들의 압박감에 내 고개는 자동으로 끄덕여졌다.
하필이면 그때, 매너모드가 아닌 내 핸드폰의 시끄러운 문자 알림 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당황한 나는 얼른 핸드폰을 청치마 주머니에서 꺼내 넘김 버튼을 눌렀다.
-공항 도착. 한 시간 후 사무실 앞-
유상현의 문자였다. 아주 일목요연하게 자기 의견만 전하는, 지극히 유상현스러운 문자였다. 한국에 오거나 말거나, 강윤지와의 대화 때문에 패닉 상태가 된 난 그렇게 뇌까리며 핸드폰을 닫으려다 헉! 하고 놀라고 말았다.
사무실? 우리 사무실 앞으로 오겠다는 건가? 이렇게 당신이 궁금해 죽겠다는 사람들 앞에 제 발로 찾아오겠다고?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해 희번덕거리고 있는 이 마당에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