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현을 유혹한 다음, 나랑 연애해요."
두둥,
머릿속에서 정체모를 북이 거침없이 울렸다. 키스를 했던 그 짜릿한 순간보다, 유상현을 유혹하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았을 때보다 그 강도는 몇 곱절 더 컸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환의 발언에 난 거래를 할 당찬 의지를 잃은 채 무표정으로 훽,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집으로 향했다. 쫄레쫄레 나를 따라온 환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조잘거렸다. 내가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은 채 혼자서 말이다. 물론, 그 좁은 공간 안에서 환의 조잘거림은 작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왜 그럴까? 진심인데. 키스도 진심이었고. 그리고 난 정말 유상현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데. 그 중요한 카드 말고도, 좋아하는 음식, 책, 열 번도 넘게 봤을 영화. 아, 유상현 혼자 영화 보면서 울기도 한다!"
영화?
혼자 운다고? 그 대목에서 내 눈빛이 미묘하게 살짝 흔들렸다. 바늘로 쿡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유상현에게도 눈물이란 게 생성되고 또, 흐른단 말이지?
'정말? 그게 무슨 영환데?'라는 질문이 목구멍으로 점프하듯 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나의 뛰어난 인내심으로 인해 꾹꾹 밀려 내려가 다시 밑바닥으로 하강했다.
하지만 환은 그런 나의 심리를 재빠르게 캐치했는지 한 옥타브 더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뭐, 그뿐인가? 만화책 보면서 키득거리기도 하고. 음… 무엇보다 그 인간 여자 취향은 내가 꿰고 있지. 암튼, 그런 것들을 다 안다면 유혹하기 싶지 않을까? 내가 그 인간이랑 몇 년을 같이 살았더라~."
환은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씩 소리 내어 숫자를 세었다.
갑자기 베컴 부부의 사생활을 폭로한 가정주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2003년에서 2005년 그러니까 만, 이 년 동안 베컴 부부와 아이들의 가정부로 일을 했던 에비 깁슨이란 여자는 베컴 집에서 해고된 후, 영국 타블로이드 주간지인 '뉴스 오브 더 월드'를 통해 베컴 부부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공개했다고 했다.
기사 제목은 닫힌 문 속의 베컴 부부(Beckhams Behind Closed Doors).
그녀는 베컴이 바람을 피워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다느니, 빅토리아가 임신 중일 때도 베컴은 빅토리아에게 욕설을 했고, 단지 그 둘은 돈을 벌기 위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쇼윈도 부부라고 말했다. 뭐, 결국 에비 깁슨은 신문 내용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베컴에게 사과를 하며 배상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때 기사를 보며 문득, 두 가지 궁금증이 들었었다.
첫째, 기사 인터뷰로 그녀는 대체 얼마를 받았을까?
둘째, 에비 깁슨이 한 말들은 대체 얼마만큼 믿어도 좋은 걸까?
그리고 지금 다시 세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 환이 한 말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까?
둘째, 설사 환의 말을 믿고 모든 패를 가지고 유혹한다 해서 유상현이 정말 넘어올까?
셋째, 만약… 정말 만약 내 유혹에 넘어온다면 나에게 어떠한 이득들이 생길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환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괜스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 바운더리에서만 꾸물거리며 물건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그때, 지금까지 까맣게 있고 있었던 핸드폰이 내 눈에 들어왔다. 소파 한구석에서 부르르 혼자 떨고 있는 핸드폰을 주워 든 난 수신자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폴더를 열고 귀에 가져다댔다. 그러자마자 바로, 핸드폰을 통해 까칠함으로 똘똘 뭉친 남자의 목소리가 투박하게 흘러나왔다.
"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당황한 난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에 표시된 수신자를 확인했다.
001 81 ******.
뭐지? 이 시작부터 수상스런, 낯선 번호의 조합은? 번뜩, 일본으로 갔다던 유상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받고서도 말이 없는데?"
"아, 아니요. 무… 무슨 일인데요?"
나는 정자세로 소파에 앉아 진지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정체모를 묘한 기분에서였다. 환이가 슬쩍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불쑥 고개를 숙여 얼굴을 나에게 향한 채 입모양으로 물었다.
‘유 상 현?’
난 새초롬한 눈으로 환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이 내 옆으로 더욱 바싹 붙어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밀어내봤자 귀찮은 강아지처럼 졸졸 쫒아 다닐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난 환이를 때어내는 것을 포기한 채 통화에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환이랑 같이 있어?"
유상현이 말했고 난 슬쩍 환의 눈치를 봤다. 환이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환이를 째려보며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아니요."
"비밀은 지켰겠지?"
"그럼요."
"나 내일 한국 가."
"……"
‘그래서 어쩌라고요?’라는 대사는 그냥 얌전히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이 사람은 누군가와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전화 내용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환이랑 같이 있는지, 비밀은 지켰는지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취조하듯 묻고는 내일 한국에 간다는 통보 아닌 통보를 해왔다. 질문과 통보만으로 대화를 하는 그나 그런 그의 페이스 맞춰주고 있는 나나 둘 다 웃기긴 매한가지였다.
"너랑 일이 생각보다 커졌어. 그래서 일단은 너랑 나랑 연기를 해야 할지도 몰라."
"네? 연기요?"
"들어가서 이야기해. 내일 일 끝나자마자 전화하도록."
내가 다음 말을 묻기도 전에 핸드폰에선 유상현의 목소리 대신 뚜뚜뚜뚜 신호음만 들렸다. 다시 재 통화 버튼을 눌러봤지만 소용없는 번호였다.
짜증, 취조, 취조, 통보, 지시-뚝!
뭐 이런 유상현스러운 통화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극히 자기가 궁금한 거, 신경 쓰이는 것만 체크하고 지시하고는 툭- 끊어버리다니. 나도 유상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단 말이다. 나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 봐, 싸가지라니까! 근데요, 누나가 모르는 중요한 게 하나 있어."
난 대답 대신 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상현한테 누나가 영 싫은 존재는 아니라는 거지."
"……뭐?"
"그 인간 싫으면 아예 상대도 않거든. 뭐 나도 그렇고. "
꼴깍, 침이 넘어갔다.
난 몸을 환의 방향으로 비튼 후 진지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환! 넌 왜 그렇게 유상현이 싫은 건데?"
"그건 천천히 말해줄게요."
"조커가 될 수 있는 그 비밀도?"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내 제안 어떡할 거예요?"
"유상현을 유혹한 후 너랑 만나는 거?"
"응."
나와 환은 꽤나 긴 시간을 서로 마주보았다. 무의식 중에 시선이 계속해서 환의 불그스름한 입술로 향했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일곱 살 차이.
생각해보면 가능한 나이기도 했다.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환이가 어른이 되고 일곱 살 차이면 가능할 법도 하지만, 환이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환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당당하게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고, 환이가 이제 막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대학교 1학년이 되어 한껏 어른의 자유를 누리며 돌아다녔을 것이다. 일곱 살 차이는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나이 차이도 아니었다. 물론 환이가 잘생긴데다가 똑똑하고 집안도 좋고 스타일도, 성격까지 완벽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키스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래서 욕심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피식 웃어넘기려던 그때였다. 환이 겨우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내 마음을 다시 흔들어버린 건.
"아까 키스 좋았잖아요. 누나도 나한테 흔들리고 있는 거 맞잖아."
누나도?
그럼 너도?
그의 그 한마디 말에 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현실에 대입해보았던 갖가지 경우들이 와르르 소리 없이 무너져내렸다.
뭐랄까, 이성적으로 차곡차곡 쌓아둔 벽이 '두근-'이라는 형체 없는 돌덩이로 인해 금이 가고 끝내 무너져버렸다고 해야 맞는 걸까. 그렇게 무너져버린 벽 안으로 애써 모른 척해왔던 내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는 부분들이 뒤섞여 있어 분명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환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듯했다. 난 내 대답을 다소 초초한 듯 기다리고 있는 환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함과 걱정스럽게 굳어 있던 그의 눈이 곱게 활처럼 휘는 듯하더니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기쁜 듯이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약속 꼭 지켜요. 유상현을 유혹하고 내 복수가 끝나면 그때는 나한테로 꼭 오겠다고."
돌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악마였다. 그리고 난 악마의 유혹에, 나약한 인간의 속성에 따라 '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악마의 제안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