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위치한 곳은 하얏트 호텔 리젠시 로비 라운지이다.
마음의 울렁증을 다소 진정시켜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캐모마일을 주문해 홀짝홀짝 마시다 문득, 시계를 보니 6시 59분이었다.
아직 그 인간(유상현)과 대면하기 까지 1분, 정확히 60초가 남았다.
전혀 걱정할 것 없다.
떨 것도 없다.
'백이현. 괜찮다니까. 너에겐 네가 거주하고 있는 집 거실 소파와, 약간의 자유를 살짝 빼앗기고―아, 적지 않은 식량도?―얻은 무기가 있잖아!'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자꾸만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고, 입천장의 수분이 증발해버려 바싹거리는 걸 보면 난 지금 유상현과의 만남에 대해 굉장한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한도가 남아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위태위태한 신용카드를 내민 후 제발, 제발, 제발 한도 초과가 아니길 그 짧은 시간 안에 노심초사 기다릴 때보다 더. 뭐, 결과는 항상 “고객님! 한도 초과입니다. 다른 카드는 없으십니까?”라는 점원의 깍듯하지만, 일말의 의심과 측은함이 골고루 섞인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어쨌든, 내가 지금 가져야 할 것은 당당함, ‘똘끼’, ‘무대뽀 정신’, 임기응변 등등! 다음 주 기사로 써야 할 패리스 힐튼의 뇌와 온 몸에 그득히 분포되어 있는 뭐, 그런 류의 것들이다. 사실 그녀의 ‘똘끼’와 당당함, ‘무대뽀 정신’, 임.기.응.변.을 그리 간단한―누구나 마음먹으면 다 할 줄 아는―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최근에 실제로 있었던 그녀의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았던가.
패리스 힐튼이 영화의 흥행 참패의 책임 여부를 둘러싼 소송재판을 받았을 때, 재판관은 그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 〈패리스 힐튼의 My New BFF〉에서 ‘BFF’가 어떤 뜻인지 물었고 패리스 힐튼은 즉각 “내 생애 최고의 친구(Best Friends Forever)”라고 대답했다. 재판관은 곧바로 “이 재판이 내 생애 최고의 소송(My Best Case Ever)”이라고 말했고 패리스 힐튼도 즉각,
“당신은 내 생애 최고의 재판관(You are My Best Judge Ever).”
이라고 응했다. 그렇다. 이 재치 있는 임기응변과 당당한 ‘똘끼’는 재판 분위기를 그녀 쪽으로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했고, 결과 역시 패리스 힐튼에게 유리하게 가져갔음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 오늘 난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아야 한다. 오늘 밤 유상현과의 거래에서 내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드르륵, 바로 옆에 놓아둔 가방 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가방 안으로 손을 휘휘 저어 핸드폰을 꺼냈다. 컬러메일 도착을 알리는 불빛이 깜박거렸고 발신자는 '환'이었다.
“누나, 형에 대해 제가 말한 것들, 잊지 말아요. 그리고 올 때 꼭! 콜라와 초콜릿 사와야 해요. 콜라는 제로 말고 오리지널. 초콜릿도 흰색 말고 진한 검은색! 파이팅!“
그래. 내겐 환이 유상현에 대해 말해준 것들이 있잖아? 잊으면 안 되지. 절대.
느지막이 일어난 우리는 거실에서 데면데면 서로 마주보며 피자, 샐러드, 콜라 등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의 뱃속에 초콜릿 거지가 터를 잡고, 등 뒤에는 콜라귀신이라도 얹혀살고 있나 심히 의심이 될 정도로 그는 초콜릿과 콜라에 빠져 있었다. 2리터짜리 콜라를 혼자 몽땅 비우고 마지막 남은 얼음 한 알까지 아그작거리며 씹더니 이내, 꿀꺽 삼켜버렸다. 목젖이 덜컹 움직이는 동시에 그는 대단히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 유상현 그 인간. 약혼자 있었던 거 알아요?”
당연히 모른다. 타블로이드지에서조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던 얘기이다. 난 놀라서 먹고 있던 피자 조각을 땅바닥에 팽개쳐놓곤 “정말?” “누군데?” “둘이 진심으로 사랑해?” “근데 케리 팍스와는 무슨 관계야?” “아니, 아니. 있었던 건 뭐야? 파혼한 거야 그럼?”이라는 질문을 한여름 낮 소나기 퍼붓듯 퍼부었다. 그리고 한여름의 소나기가 급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내 질문도 금세 소진 돼버렸다.
“정말이에요! 그런데 누군지는 나중에 말해줄래. 뭐, 재벌 집 딸 정도로만 알아둬요. 그리고 음… 세번째 질문이 뭐였지?”
“아, 둘이 진심으로 사랑해였을걸?'
신기하게도 입이 뇌를 거치지 않은 채 스스로 재빠르게 행동을 했다. 난 내 입이 자랑스러웠다.
“에이, 아니지. 그 인간이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잖아? 그러니까 케리 팍스도 하루 알바? 아니 그 여자는 수습사원 기간 정도는 됐었겠다. 뭐. 그런 상대였고. 파혼은 곧 할 예정.”
환은 그 말을 끝으로 졸리다며 소파에 가서 시체 쓰러지듯 픽, 쓰러져버렸다. 난 그 모습을 보다가, 그가 더 깊은 잠에 들기 전에 꿇어앉아 있던 채로 환에게 다가가 이런 일급정보를 나에게 발설해도 되냐며 넌지시 물었다. 그 질문에 그는 눈을 감은 채 “응. 거래잖아요. 아, 그리고…”라며 무언가 말을 더 꺼내려다가 이내 시금털털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만 잘 거니까 절대 깨우지 말라며, 부드러우면서도 고집 있게 말하고는 내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는 금세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 난 그 정도로도 족했다.
그가 당황해하던 그.쪽.은 분명 약혼녀 쪽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다시 한 번,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환이 아니라 유상현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꼴깍하고 침이 넘어갔다.
“설마 스위트룸 오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1분 초과”
시계를 보니 7시가 딱 1분 째 지나고 있었다.
까탈스러운 놈.
난 식은 캐모마일을 벌컥벌컥 들이 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세하게 진동 중인 오른손으로 가방을 들어 어깨에 사뿐히 메고선 장차 30분이라는 시간을 고심한 끝에 선정한!! 11센티미터의 굽을 자랑하는 레오파트 무늬 구두에 내 체중을 실은 채 한 걸음 내딛었다.
휘청, 11센티미터나 되는 굽이 살짝 휘청거리더니 금세 꼿꼿이 자리를 잡았다.
여자에게 구두의 굽은 자존심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 자존심은 구두로 따지자면 최고치인 것이다!!
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가슴은 앞으로, 엉덩이는 뒤로 쭉 뺀 채 패리스 힐튼보다 도도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었다.
그때, 누군가가 헐떡이며 내 뒤를 따라왔다. 살짝 머리를 넘기며 뒤를 돌아보니 라운지의 매니저처럼 보이는 여자가 날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엉덩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님…
"손님. 계산을 깜빡하셨나 봐요."
그녀는 영업용 스마일을 지으며 나에게 계산서를 건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깜빡했다는 쿨한 제스처를 취한 후 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녀가 내 카드를 가지고 계산을 하러 간 도중 또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기자라면 알 텐데? 내 일분이 얼마짜린지?”
정확히 10원 단위까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어림짐작으로 상상이 되는 것들이 있다. 꼭 기자가 아니라도, 꼭 그의 팬이 아니어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지는 그런 것들, 그런 스케일, 그런 사람. 그리고 하나 더. 그가 말한 그 일분이 내가 방금 마신 이 캐모마일 한 잔 값보다 비싸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