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죠?"
"어? 어. 유, 유상현은 키스 씬 할 때 무슨 생각을 한대?"
"아니, 그거 말고 나와 유상현과의 관계."
이런! 그 아이의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나를 향해 보란 듯이 웃고 있었다. 지금 난 나보다 무려 '칠' 년이나 덜 산 아이에게 낚시질을 당한 듯했다.
"사촌형이에요. 유상현. 그 인간."
온라인상이 아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근거리 낚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 아이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툭, 유상현이 자기 사촌형이라고 말했다. 사촌형? 그 아이와 유상현이 사촌이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난 정말 행운을 넝쿨째 손에 얻은 셈이었다. 남친이 커밍아웃을 하며 이별을 선언하더니, 그건 다 이 행운을 위한 액땜이었던 듯싶었다. 양손 가득 거머쥔 행운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는 이제부터지만.
그리고 세 글자.
딱 세 글자. 유상현의 사촌이라는 '환' 그 아이가 말한 '그 인간'이란 단어에서 이미 그들의 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유상현 그 인간, 분명 집에서도 꼬장꼬장 지 성질부릴 것 다 부리며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나 매니저들을 괴롭히고 가족에게도 싸가지로 일관할 것이다.
"안 믿겨요? 진짠데…"
그러더니 그 아이는 계속 열려 있던 내 노트북 자판 중 하나를 검지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대기모드였던 노트북이 부르르,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내며 윈도우 모드로 돌아왔다. 그 아이는 능숙하게 터치패드를 만져서 모니터에 인터넷 창을 띄웠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유상현의 훈남 조카’를 치자, 검색창 자동완성기능에 의해서 바로 검색되었다.
"보이죠? 유상현의 훈남 조카. 바로 그 훈남 조카가 나라고요."
그 아이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찍힌 사진을 가리키며 자신의 가슴팍을 쿡쿡 눌렀다.
"정말이네?"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누나가 말해 봐요."
"뭘?"
"누난 형의 팬이에요, 아님 적?"
‘적’이라고 한 음절을 발음할 때에 약간 힘이 들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내 직감으로 보건데 그 아이는 유상현에게 쌓인 것이 많은 게 틀림없었다.
"일단 팬은 아니고…"
"그럼 역시 적?"
난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싸가지에 질려버린 건 확실하지만, 콕 집어 ‘나의 적’이라고 단언할 순 없었다. 물론, 아군인 것도 아니다. 그와 만나기로 한 하얏트 호텔에 가봐야 유상현이 나의 적인지 아군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서 그는 '적'도 '아군'도 아니면서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존재였다.
어른이 되면 이런 모순된 이해관계들이 속속들이 생긴다. 사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속에서 마녀는 공주에게 저주를 퍼붓는 사악한 존재였지만 결국 그녀(마녀) 때문에 공주는 왕자를 만나게 되고 100년이란 시간을 더 살게 된 것 아닌가? 요즘은 자기 몸을 냉동해서라도 미래로 가고 싶어 하는 세상 아닌가. 결과론적으로 악이 선의 결과를 낳을 수도 또 선이 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이다.
"누나, 우리 거래할까요?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
"거래?"
"네. 팬은 아닌데 이렇게 우리 형 기사를 찾는 거 보니까 내가 누나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빙고!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니 역시 그 아이와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거다. 그래도 난 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럼 난 뭘 해주지?"
"숙.식.제.공."
"숙식 제공?"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난 그 아이의 말을 큰 소리로 반복했다. 그 아이 또래라면 옷이라든지 신발이라든지 게임기라든지 좀더 구체적이고, 가지고 싶었지만 비싸서 부모님은 안 사주시는 ‘물건’을 원할 줄 알았다.
"응. 숙식 제공. 한류스타 유상현의 비밀을 알려준다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그가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근데… 여긴 나 혼자 사는데? 방도 하나고."
그 아이가 턱으로 옷 방을 가리켰다. 이미 다 둘러봤다는 듯이.
"저긴 완전 조그마해. 옷들로 꽉 차 있고 원래 사람이 잘 만한 방이 아닌데?"
"누나 나랑 거래하기 싫구나."
그가 급격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난 네가 불편할까봐."
"난 하나도 안 불편해요. 자는 건 소파에서 자면 되고! 밥은 많이 먹지만 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거예요. 유상현에 대한 비밀."
그래. 유상현에 대한 비밀. 어쩌면 그쪽에 대한 것을 알아낼 수도 있다.
"얼마… 동안?"
"두 달. 두 달이면 돼요. 그래. 그냥 펫 키운다고 생각해요, 펫."
"펫?"
"응. 펫. 애완동물. 왜 일본 만화에 『너는 펫』 있잖아요. 그런 거 해보고 싶었어요, 나."
너는 펫?
물론, 그 일본 만화와 드라마를 보며 나도 무척이나 그 안의 여자 주인공 ‘스미레’를 부러워했다. 일류대 출신인 엘리트에 잘 나가는 신문사―‘플러스 텐’과는 격이 다른―의 커리어 우먼. 거기다 귀엽고 사랑스런 '펫'을 소유하기까지. 특히나 드라마에서 ‘마츠준’은 여심―특히 누나―을 흔들기에 제격이었다.
뭐, 왕자님에게 나이 제한은 없다. 날 공주로만 만들어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나저나 '펫'이라. 내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그 아이가 현관 앞에서 나를 맞아준다면? 하루 종일 밖에서 일과사람에 치인 내 마음이 조금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아이, 마츠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럽단 말이다. 또! 제일 중요한 것! 유상현의 조카라는 사실! 나는 나쁘진 않겠다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끄덕였어요? 그럼 계약 성립이죠? 그럼 이제 우리 자요."
그가 말했고 순간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난 방에서, 난 여기서. 나 계속 졸리거든요."
헛된 상상을 한 난 피식 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응. 근데 그럼 유상현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일어나면 누나가 궁금한 거 말해줄게요. 밥 먹고."
그러고 보니, 벌써 새벽 5시였다. 시간을 알고 나니 몸이 찌뿌드드해지고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이제 토요일 저녁 10시까지 딱 19시간이 남았다. 유상현을 만나기 전에 그 아이에게 그의 비밀을 듣는다면, 내가 쉽게 유상현에게 휘둘릴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 아이를 소파에 남겨두고 나는 내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몸은 피곤한데 막상 누우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말똥해진 눈으로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펫’이라는 단어를 주기적으로 읊조렸다.
'펫'
사실 ‘펫’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본 드라마 〈너는 펫〉의 마츠 준 보다 패리스 힐튼의 애완견인 치와와 '팅커벨'과 한국에서 구입한 포메라니안 ‘김치’다. 힐튼의 강아지는 350만 원짜리 루이비통 가방을 이동 '집'으로 소유하고 있고, 250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목줄을 차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 간 '김치'는 김치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으며 현재 할리우드 파파라치의 집중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강아지. 강아지가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나라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된 패리스 힐튼이 구입한 강아지의 보금자리. 우리나라 돈으로 약 30억 원의 애완견 저택. 그곳에는 강아지용 보석과 향수 게다가 AV시스템까지 갖춰져 있다고 한다. 그만큼 패리스 힐튼이 자신의 애완견들을 위한다는 것이다. 뭐, 애완견이 살이 쪘다는 이유로 몰래 버려 동물보호협회에서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지만.
갑자기 15평 남짓 되는 나의 집이 ‘팅커벨’과 ‘김치’가 살고 있는 집보다 못한 것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치면 '환', 나의 펫이 되기로 한 '환'은 주인을 잘못 만나도 한참을 잘못 만난 것이 아닌가?
자고로 옛날부터 여자는 남자를 그리고 개나 고양이는 주인을 잘 만나야 호강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내일을 위해 난 어서 빨리 수면을 취해야 했다. 이 아이에게 유상현에 대한 비밀을 캐내려면 먹을 만한 '요리'라는 것을 시도해야 할 것이고, 또 저녁엔 그 비밀의 당사자 유.상.현을 만나러 가야 한다. 하얏트 호텔, 10002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