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몇 시간을 단잠의 세계로 빠져든 나는 꿈속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아이와는 다른 목소리였던 것이다. TV에서는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며 최근 종영된 드라마 〈찬란한 유산〉이 재방영되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도한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 아이가 없었다. 화장실에 있을까 싶어 염치 불구하고 문 가까이 귀를 가져가봤지만 오줌 줄기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역시 그 아이는 없었다.
서둘러 부엌으로 간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콜라를 꺼내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아, 여기 있었구나. 그런데, 이 안도감은 뭘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아이는 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네 왔다.
"콜라가 미적지근해서 잠시 넣어뒀거든요. 마음대로 써서 미안. 근데 무슨 여자가 모르는 남자가 있는데 그렇게 잠들어 있어요?"
라고 묻는 그 아이의 웃음이 너무나 싱그러워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러게'라고 맞장구치며 따라 웃었다.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기대 앉아 시원한 콜라를 마시고, 감자칩을 바스락거리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모르는 사람이 우리 둘을 봤으면 한 집에서 같이 사는, 나이 차가 꽤 있는 누나와 남동생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여자는 저렇게 잘해주던 준세(배수빈)를 버리고 싸가지가 바가지였던 환(이승기)을 택하는 거예요?"
"글쎄. 캔디가 안소니 보단 테리우스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에? 안소니는 죽었잖아요. 낙마로. 그러니까 테리우스를 사랑하게 된 거 아닐까요?"
"그런가? 내 생각엔…"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이 어린아이와 나름 심도 깊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 몇 살이야?"
"19살이요."
생각보다 두 살이나 더 많았다.
"이름은?"
"환이요. 이환."
"아. 드라마 속 이승기랑 이름이 같구나."
그 순간, 드라마 〈찬란한 유산〉의 마지막 명장면인 한효주와 이승기의 키스신이 TV 화면 가득 들어찼다. 다시 봐도 설레는 장면이었다. 사랑을 확인하는 키스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데 입술과 입술이 맞닿으면서 느낄 수 있는 그 촉감과 상승하는 심박수는 키스하는 두 사람의 몸을 한껏 뜨겁게 해줄 것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묘한 흥분감이 하루 종일 지속되겠지. 난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그 아이에게 들렸는지 옆에서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민망하기도 해서 그럼 좀 어떠냐는 의미를 담아 새침한 표정을 날려주었더니, 별안간 그 아이가 살짝 엉덩이를 들어 내 곁으로 천천히, 바싹 다가왔다. 당황하자 귀가 밝아졌는지 소파에 옷이 쓸려 바스락거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렸다. 서로의 어깨가 맞부딪히자 나는 새삼 느끼는 당황스러움에 몸을 움직여 그 아이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그 아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이승기와 한효주의 키스는 계속되고 있었다. 저 키스신이 유난히 긴 건지,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슬로우 모션처럼 느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불과 몇 초전엔 TV 화면에 시선이 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바짝 긴장한 나머지 어디다 눈을 둬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발가락에서 리모컨으로, 책장으로, 가방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쓰윽, 하고 내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의 얼굴과 얼굴은, 불과 5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거리. 미미하게 그 아이의 체온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솜털이 다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얘가 대체 왜 이래!
다시 한 번 꿀꺽, 하고 내 침이 목젖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는 최근 ‘네이트 톡'이나 억울해요' 채널에서 본 '남자친구가 찜질방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라는 글이 반짝하고 떠올랐다.
붉은 빛이 감도는 입술. 바로 코앞에서 전해져오는 숨결. 내가 이성이 존재치 않은 인간이었다면 그냥 두 눈 꼭 감고! 그 아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그 아이는 미성년자라는 것을! 물론,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 그 아이지만 이대로 신고당한다면 경찰이 누구 편을 들어주겠는가.
'2년간 만난 애인이 게이라는 사실에 슬퍼하되, 성추행자는 되지 말지어다.'
또 한 번 침을 꿀꺽 삼키며 내 욕망도 같이 삼켜버렸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 그 아이는 씨익, 웃으며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남자 배우들 저렇게 키스 할 때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요?"
"모… 모르긴 몰라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럼 퀴즈!!! 유상현은 저런 씬 찍을 때 무슨 생각 할까요?"
그때 다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휴, 바보. 등신. 이 멍청한 것!
난 이 아이의 달콤함에 빠져 중요한 사실을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상현.
이 아이와 유상현과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