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늦게 물어봐서 미안한데 혹시 다친 덴 없는 거지?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고양이 때문에 급정거를 했지 뭐니. 내가 이래 봐도 동물 애호가거든. 그러고 보니 넌 고양이 파니? 강아지 파니?”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떡볶이, 족발, 보쌈, 치킨… 지금이라도 시켜줄 테니까 말만 해!”
“먹는 게 싫으면 다른 건 어때? 내가 정말 미안해서 그래. 옷 사줄까? 아, 신발은 어때?”
나는 그 아이와 유상현과의 관계를 단.도.직.입.적.으로 묻기 전, 대체, 어떻게, 무슨 말로 이 아이의 호감을 살 수 있을까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특히나 그것이 간절히 원하는 것일 때―상대방에게 먼저 '사탕'을 쥐어주는 방법을 택한다. 사탕의 새콤달콤함은 이 사람이 나에게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경계심을 해제시키고 거기서 더 나아가 무언가를 받았으니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 것이다!
참고로 사탕의 가치는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내게 사탕은 말 그대로 '사탕'이었고 초등학교 때는 '바비인형' '공주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그리고 지금은 뭐니 뭐니 해도 백(Bag)―여자들의 로망―과 남자―게이가 아닌―이다.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돈’이 최고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대체 그 아이에게 있어 '사탕'은 무엇일까?
내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한 끼 식사를 제공받았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새로운 사탕을 원할 게 뻔하다. 그 사탕이 반드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여만 하는데…
데구루루. 눈덩이처럼 불어난 생각들이 사방팔방으로 굴러가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말짱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좀 웃는 게 좋을까 싶어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려고 했더니, 오히려 주민등록증 사진 찍을 때와 같은 억지 미소가 양 볼에 미묘한 경련이 일으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배 위에 손을 올린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사이다 없어요? 아님 탄산음료 아무거나. 급하게 먹었더니 체했나 봐요.”
고맙게도 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탄산음료는 나와 연(緣)을 끊은 지 오래였다. 녀석들은 갈증이 날 때 마시면 가슴 깊숙한 곳에 청량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피부의 적이자 다이어트의 적이요 칼슘의 적이었다. 나이 먹으면 주름 늘고 옆구리 살 늘어지는 건 당연한 건데, 굳이 탄산음료를 마셔가며 그 끔찍한 날들을 하루라도 더 앞당기고 싶진 않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유를 핑계로 콜라와 사이다를 끊은 지 약 일주일 하고도 하루가 더 되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 후회하고 있다. 비상용 콜라를 비치해두는 건데.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없으면 있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얼른 뛰어갔다 오면 적어도 5분 뒤엔 그 아이에게 사탕을 쥐어줄 수 있다! 그렇지만 얼굴 표정은 마침 슈퍼에 갔다 올 일이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지어 보인 뒤, 천천히 지갑을 챙기고 뭘 신고 나갈까 잠시 망설인 다음에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동네 편의점을 향해 마음만은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동안 문득 '혹시 그 아이가 신종 사기단?'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초미소년을, 그리고 순수해 보이는 그 아이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믿기로 했다. 아냐, 날 이렇게 자연스럽게 밖으로 내보내고 도둑질이라도 해서 달아나는 건 아니겠지? 유상현 때문에 잠시 타인을 집에 들여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잊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나의 또 다른 망상이길 바라면서 콜라, 사이다, 환타와 갖가지 주전부리용 과자들을 재빨리 낚아채 계산하고 또 다시 집을 향해 냅다 달려갔다. 현관 앞에서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아이는 아직 내 집에 있었다. 소파에 누워 양손을 베개처럼 베고 또 다시 잠이 들어버린 채로. 피어올랐던 의심들이 거품처럼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순간, 그 아이의 '히스토리'가 궁금해졌다. 대체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남의 차 루프 위에서 그토록 곤한 단잠을 자고, 몸은 여리한데 식성은 거인 같고 또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남의 집에서 잠이 든 것일까.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 아이에게 어떤 경계심도 가지지 않게 만든 능력이 궁금했다. 심지어 그 아이는 내 소파 위에서 늘 저 자세로 잠을 자던 누군가인 것 같았다. 어쩜 그건, 일종의 초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난 조용히 소파 곁으로 다가가서 그 아이의 자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이런 말이 떠올랐다.
'결핍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남자―특히 소년―는 여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비록 비좁은 소파지만 이대로 가만히,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라도 쉬어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아마도 휴식이 필요해서 낯선 곳에서도 잘 자는 것일 거라고, 그렇게 이해해주고 싶었다. 아, 그렇다. 그 아이는 나도 몰랐었던,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난 가만히 그 아이의 얼굴을 감상하다 어느새 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