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고백컨대, 처음이다.
낮.선.남.자.
그것도 으슥하고 후미진 골목에 불법으로 주차를 해놓았던 내 차 루프 위에서 나 몰라라 단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이상한 남자. 아니, 아이를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끌어 들이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끌어 들인 것뿐인가?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나이도 몰라요!'인 그 아이는 내가 너무 고심해서 고른 나머지 조그만 얼룩도 용납할 수 없는 '예쁜 식탁' 앞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바로 코앞에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볼이 미어지도록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는 걸 보니 정말 배가 많이 고팠나 싶었다. 하긴, 차 루프에서 보닛으로 굴러떨어졌는데도 나한테 제일 먼저 한 말이 배고프단 것이었으니.
내가 차려준 보잘 것 없는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있는 그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첫째는 어쩜 그렇게 예쁘게 생겼니?
둘째도 어쩜 그렇게 예쁘게 생겼니?
아, 질문이 중복됐나.
그럼 세 번째는…… 어쩜 그렇게 귀엽게 생겼니?
그랬다. 정말 그 아이는 예쁘게 생겼다. 생채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앳된 얼굴선, 자연스럽게 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 그리고 얼굴에서 단연 돋보이는 붉은 입술.
그 아이도 남들은 립스틱을 바르거나 틴트를 면봉에 묻혀 꾹꾹 입술 전체에 눌러대야만 생기 있게, 붉게 물들어 오르는 입술을 엄마 뱃속에서부터 소유하고 나온 부류 중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순정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꽃미남들이 현실에서도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맞다. 그러고 보니 싸가지 유상현도 딱 이런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밥 더 있어요?"
유상현과 만나기로 한 하얏트 호텔 10002호.
대체 그 밀폐된 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지. 어쩜 검은 양복을 입고 정갈하게 빡빡 민 머리, 목에 금목걸이를 치렁치렁 건 사내들이 날 협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들은 한껏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한 뒤, 내 가방과 몸을 뒤져 핸드폰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는 동안 유상현은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향해 한껏 비열한 미소를 날려줄 것이다. 사내들이 유상현에게 내 핸드폰을 넘겨주면 그는 문제의 사진이 든 폴더를 찾아내 과감하게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을 테지만! 하지만 내 핸드폰은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비밀번호'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단 말이다. 그렇담 다시 그들은 그 번호를 알기 위해 온갖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날 고문할지도 모른다. 유상현은 여자에게 어떻게 못되게 굴어야 할지를 잘 아는 남자일 것이다. 예를 들면, 아직 할부도 안 끝난 백(Bag)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거나, 날 자신의 스토커로 만들어 인터넷에 신상 공개라도 해버린다면 난 순식간에 '스토커녀'란 타이틀을 가지며 전 세계 유상현 팬들을 적으로 두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케리 팍스의 스캔들은 스토커가 조작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보란 듯이 묻혀버릴 것이다.
아님 21세기에 가능한,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고문은 온 몸을 묶어 놓고 간지럼을 태우는 거라고 하는데! 정말 죽도록 간지럼을 당하다가 죽어버린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또다시 허공에 떠오른 끔찍한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구나."
"어?"
그 아이의 풀 죽은 목소리 때문에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짧게,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나도 안다. 난 아마도, 이대로 혼자 늙어 죽게 될 거라면 상상과 망상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밥. 더 있냐고 물었는데……"
그 아이가 말꼬리를 내리며, 한 번 더 물었다.
"아. 햇반이 어디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
* 요즘은 음료수도 스타일을 완성하는 액세서리가 될 수 있다. ‘원색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패션음료’인 ‘비타민 워터’가 바로 그 증거다. ‘섹스 앤 더 시티’와 ‘가십걸’에 등장해 스타일 음료로 인정받은 비타민 워터. 패셔니스타가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하는 법이 있던가. 그날의 의상과 액세서리에 맞게 ‘깔 맞춤’을 할 수 있도록 비타민 워터도 ‘파워C(빨강)’ ‘에센셜(주황)’ ‘에너지(노랑)’ ‘멀티V(하양)’ ‘리스토어(자주)’ ‘트리플 엑스(진빨강)’ 등 다양한 색을 구비하고 있다. 단, 마시다가 옷에 흘리면 얼룩이 져 망신살 뻗칠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 옆에 있는 수납장을 열었다. 지금 저 아이에게 준 스팸, 햄, 김 모두 이곳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햇반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전자레인지에서 햇반이 돌아가는 동안 냉장고에 매니큐어처럼 색색별로 진열되어 있는 비타민 워터" 중 오렌지 맛을 꺼내들었다.
그 아이는 또 아무 말 없이 새로운 햇반을 먹어 치웠고, 난 그 앞자리에 뻘쭘하게 앉아 비타민 워터를 여러 번 나눠마셨다. 갈증이 해소됨에 따라 그 아이에 대한 궁금증은 더 쌓여만 갔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먹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예전에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가진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밥을 먹을 때 '개'가 자신의 주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지 아니면, ‘개’가 밥을 먹을 때 사람이 ‘개’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지. 아니면 ‘개’와 ‘주인’이 같이 밥을 먹을 때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지. 지금 보니, 셋 다인 것 같다.
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갔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나는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창을 띄우고 검색 창에 '유상현'을 입력했다. 연관 검색어에 유상현 루머, 유상현 훈남 조카, 유상현 여자 관계. 유상현 성선설 성악설, 케리 팍스, 유상현 정체 등등이 떴다. 그에 관한 기사들은 패리스 힐튼이나 린제이 로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이 사건사고를 일으키고 다니는 것만큼 그가 설치고 다니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보면 결코 적은 것도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그쪽'의 정체를 찾는단 말인가.
불확실한 정보 70퍼센트. 확실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정보 20퍼센트. 정확한 정보 10퍼센트들로 구성되어 있는, 객관성보다 오락성에 치중된! 인터넷 속 정보의 망망대해를 하염없이 떠돌다 무언가 써먹을 만한 단서를 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네티즌들의 이니셜 놀이―K군이 어땠더라, J양이 어땠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에서 얼토당토않은 추리가 시작되어 종국에는 마치 진실처럼 둔갑된 이야기일 뿐이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코 소문의 진원지를 찾을 수 없을 텐데 그 속에서 '그쪽'을 찾는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한숨이 푸욱 나왔다. 그때 갑자기 털썩하고 소파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그 아이였다. 만족한 표정으로 입가를 쓰윽 닦는 그 아이. 남은 밥이 더 없을까봐 풀이 죽었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어린애한테 끌려 다니거나, 그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난,
"잘 먹었어요. 누나!"
란 말에 그 아이 몰래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란 말 한마디에 그 아이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자 이때 재빨리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질문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는데 노트북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던 그 아이가 툭, 한마디 던졌다.
"나 이사람 아는데."
"당연하지. 유명한 한류스타잖아. 대한민국에 아니 일본에서까지 이 인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맺힌 게 있었는지, 살짝 비꼬는 듯한 말투가 나온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유상현 말고, 집에서 파자마 입고 맥주 캔 따 놓고 19금 영화를 보는 그 유상현, 누나는 모르잖아요."
그럼, 난 모르지, 모르고말고.
잠깐!!!
그건 유상현의 최측근이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던가. 아니, 반대로 말하자면 '그 아이=유상현의 최측근'이란 말인가?
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은 순수해 보이는 그와는 사뭇 달랐다. 아무렴 어떤가? 여자 나이 스물여섯. 순수의 시대는 이미 멀리 떠나갔다.
사회에 발을 디디고 한 해 한 해 세상에 물이 들면 들수록 계략과 술수를 연마하는 게 죄는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긍하게 된다. 그러니! 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