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으로는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회식이 열린 횟집 근처에 몰래 주차해놓은 곳을 찾아갔다. 하이힐을 또각또각 거리며 5분 정도 어둡고 으슥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자, 서투른 윙크처럼 깜박깜박 비상등을 켜고 있는 내 차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참히 찌그러진 앞 범퍼를 수리중인 노란색 풍뎅이 차 대신에 잠시 빌린 아빠의 검정색 차였다. 문득 왜, 핑크색 차는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각이 진 그랜저라도 핑크색이라면 사랑스러워 보일 텐데!!!
난 무의식적으로 자동차 리모컨 키를 들고 열림 버튼을 ‘꾸욱’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덜컥 차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와 나와의 거리 약 5미터.
나는 내가 마신 술의 양을 계산하며 천천히 차 쪽으로 다가갔다. 맥주 두 잔. 소주 한 잔. 그렇다 해도 핑크빛으로 살짝 물들었던 내 얼굴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이미 많이 가신 상태였다. 이 정도면 운전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다행히도 회식을 했던 횟집과 집까지는 2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뭐, 만일 음주 검사를 한다 해도 내 혈중 알코올 농도는 되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내뱉는다 해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도 정 불안하면 골목으로 가도 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만든 장난감 돈.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돈과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문득, 태지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밀인데… 난 차 안에 꼭 케로로* 돈 뭉치를 넣고 다닌다.”
왜? 라고 묻는 내 앞에서 그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그 이유를 찬찬히 설명했다.
“만약 술 먹고 걸리면 케로로 돈 뭉치를 손에 들고선 살짝 경찰한테 건네는 거야. 음주 검문은 대부분 밤에 하잖아? 그럼 경찰은 돈뭉치를 슬쩍 보고는 보내주거든. 그게 진짜 돈 뭉치라고 착각하는 거지. 하하하.”
고백건대, 태지에게서 그 얘기를 들을 때 난 정말이지 그가 천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음 날, 사촌 조카의 만 원짜리 케로로 돈 뭉치를 살짝 훔쳐와 조수석 앞 콘솔박스에 넣어두었다. 그 다음 날엔 ‘어른이 케로로 돈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준 그와 키스를 했다. 그 다음 날엔 조심스럽게 서로의 몸을 탐닉했고 또 그 다음 날엔 드디어 서로를 가졌다. 그리고 일 년 후! 그는 남자가 좋다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그래도 나와는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아마도 지금쯤 나와 키스를 했던 그 입술로, 나를 만졌던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다른 남자를…… 아, 여기까지다. 더 이상 가면 위험해! 그래도 자꾸만 대책 없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 엄청난 상상의 이미지들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손을 머리 위로 뻗어 휘휘 내젓던 난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차, 아니 아빠 차 루프―차 천장―위에 어떤 남자가 몸을 조그맣게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난 놀래서 커진 두 눈을 두세 번 크게 깜빡인 후에, 종종걸음으로 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힘껏 발꿈치를 들어 잠들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잡티 하나 없이 뽀얗고 앳된 피부, 감은 두 눈 위로 보이는 옅은 쌍꺼풀 라인. 살짝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칼. 적당히 도톰하고 앙증맞은 입술…
남자는 소년이었다. 예상컨대, 얼추 열여섯이나 많게 봐야 열일곱쯤 되는, 한마디로 애였다. 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기저기 많이도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그 애의 다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난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다리를 흔들었다. 심지어 손으로 다리를 툭툭 치면서, 입으로는 좀 일어나 보라고 하소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애를 차 루프에서 길바닥으로 끌어내려 외진 골목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 내가 길바닥에 버리고 간다고 해도 그 애는 지금처럼 쿨쿨, 잠만 잘 것이고 그러면 먹이를 찾아 밤길을 헤매던 변태의 습격―게다가 그게 남자라면!―을 받아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애는 이 모든 게 그때 자기를 골목에 버리고 갔던 차 주인 때문이라며 날 저주할 테고 그러면 앞으로 만날 모든 남자들이 내게 커밍아웃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나 말고 누군가가 이 꼴을 본다면?
하고 많은 차 중에 이 애가 왜 하필 당신 차 위에서 자고 있느냐고, 당신이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게 아니냐고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지도 모른다.
경찰을 부를까? 불러서 뭐라고 하지? 이상한 애가 차 위에 있으니 내려달라고 할까? 그럼 경찰들이 이 애와 내 관계를 묻지는 않을까? 잘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말해도 그걸 그들이 곧이곧대로 믿어줄까. 괜히 이 아이와 이상하게 엮여서 경찰서를 들락날락하게 되지는 않을까.
어쩌지, 어쩌지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골목에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며 걷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틀림없었다. 난 다시 한 번 그 애의 다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끌어내려 차에 태워보려고도 했으나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 식었던 얼굴의 열이 확 오를 만큼 잠든 아이와 씨름하던 나는 더 크게 들려오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난 그 애를 차 위에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재빨리 차에 탔다. 목소리만 들리던 남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내 차 위의 남자애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술에 취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맨정신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가고도,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더 웅성대며 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핸들을 잡았다. 다행히 아빠의 차는 가로, 세로가 넓은 루프를 소유하고 있기에 내가 천천히만 운전한다면 그 애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난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손으로는 조심조심 핸들을 돌리면서 눈으로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주위를 살폈다. 분명 잘 아는 길인데, 자꾸만 어디가 어딘지 헷갈렸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쫙 흘렀다. 일단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남자애를 이대로 두고 난 집으로 올라가자. 새벽이슬 좀 맞으면 추워서라도 깨겠지.
최근 차와 인연이 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다른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새파란 동그라미 두 개가 순식간에 내 차 앞으로 끼어들었고 드디어 집에 가서 쉴 수 있다고 방심했던 난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눈이 질끈 감겼다.
끼익, 하고 차가 급정거하는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날쌔게 피한 것 같았는데. 아, 그 아이가 떨어진 건가?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안 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앞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보닛에 엎어져 있는 그 아이의 갈색 눈과 내 눈이 떡하니 마주쳤다. 이번에는 정확히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과 사람의 감정, 미스터리한 현상 등이 있다. 당하는 순간(혹은 보는 순간), ‘당황스럽다'라는 다섯 글자로도 감당이 안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지금이 딱 그렇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와 달랐다.
그 아이는 입 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더니 폴짝 보닛에서 내려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청바지를 툭툭 털었다. 바람에 쓸려 헝클어진 머리칼도 매만져주는 저 센스. 방금 전에 죽을 뻔했다는 걸 금세 깡그리 잊은 모양이었다. 제 볼일을 다 마친 그 아이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교통사고에 임하는 자세가 남다르다. 혹시, 신종보험사기단인가? 어쩜, 내가 유상현에게 한 짓도 사기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난 유상현이 열었던 만큼만 창문을 열었다. 마치 데자뷔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아이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 배고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