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현 씨 어디 가요?"
강윤지가 고개를 쓱 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그녀의 입가가 설핏 위로 올라가 보이는 건 내 체내에 흡수된 알코올로 인해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혹시 그녀가 날 싫어하나? 라는 생각이 뇌 속에 푹 파고들었지만 곧 '뭐, 아무렴 어때'라고 결론지었다.
"네. 전화가 와서요."
심드렁하게 대답한 난 어서 빨리 몸을 움직일 태세를 했다.
"애인 전화? 이현 씨 디자이너 애인 있잖아요. 꽤 유명하지 않아요? 아, 은우 선배도 알죠?"
이번엔 편집장이 아니라, 맞은편에 있는 은우 선배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뭐야. 이 여자.’
난 분명 전화를 받기 위해 일어났다고 말했고, 그녀는 그새 그걸 까먹을 만큼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취하는 나에 대한 태도가 ‘뭐, 아무렴 어때’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먹먹히, 막연히 들었다. 그럼 대체 왜? 라는 생각과 함께.
"응, 알지. 나 인터뷰 몇 번 한 적 있잖아. 이현 씨. 아직 잘 만나고 있지? 결혼은 안 해?"
결혼이란 두 단어가 가지는 파워는 우리 팀 내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집중시켰다. 제길. 나는 다행히 아직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꼭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울림이 언제까지고 날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야? 혹시 헤어졌어?"
"에이 설마. 태지 씨 여자한테 관심 없잖아."
"또 책 쓴다는데 이현 씬 좋겠어?"
라고 내 이름을 꺼내면서도 날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날 버린 후 자신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았다. 유독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인간은 강윤지 단 하나였다. 어쨌든, 다행인 건 이들 중 아직 태지의 ‘커밍아웃’을 아는 이가 없다는 거였다. 편집장은 이번엔 도미가 아닌 애처롭게 꿈틀대고 있는 낙지를 꾹 꾹 눌러대며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갈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제일 거세게 자신에게 저항하는 놈을 고르리라.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잔혹성은 때로 산낙지를 먹는 모습에서 쓱 나타나곤 한다.
내가 만일 여기서 태지의 ‘커밍아웃’을 입 밖에 낸다면 이들은 나와 태지를 저 낙지 꼴로 만들 것이 분명했다.
“이현 씨 왜 아무 말 안 해? 정말 헤어진 거야?”
강윤지가 물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고, 난 가식적으로 ‘씨익’ 웃었다. 그리고 시금털털한 말투로 말했다.
"아직요. 근데 아직 아까운 나이잖아요? 결혼하기에는.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다들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들었다. 난 서둘러 가방을 들쳐 맸다. 비키니를 입을 수 있는 완벽한 몸매가 될 때까지 여름은 기다려주지 않는 것과 같이, 이 핸드폰의 울림도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갈 때까지 인내심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백 기자 가려고?"
여전히 낙지들을 괴롭히고 있는 편집장이 물었다.
"아……"
무슨 핑계를 대지? 순간, 떠오르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회식 자리애서 빠져나올 수 있는 최고의 무기. 일. 페리스 힐튼 기사.
"셀러브리티 기획 정리해보게요. 그리고 패리스 힐튼 기사 쓰려면 엄청난 자료 조사를 해야 하잖아요.“
젠장. 내 무덤을 내가 팠다. 내 고생길을 내가 열었다. 난 내 스스로 열등감과 질투심을 키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 우선순위가 있고 지금 나에겐 그 우선순위가 이 전화를 받는 것이다.
편집장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한 손으로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난 모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젠 패리스 힐튼의 가십에 대해 탁상공론을 벌이고 있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데이트를 했느니 어쩌느니 섹스 비디오에 대한 대처는 정말 현명했다느니. 공개된 패리스 힐튼 뇌 구조를 보았냐느니. 그녀가 스물다섯이란 젊은 나이에 상속받은 재산이 무려 4천억 원이라니. 계속되는 주제의 전환. 누군가를 잘근잘근 씹는 것. 회식 자리의 통속적인 풍경이다.
갑자기 주제넘게 아주 살짝 패리스 힐튼이 측은해졌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전 세계 몇 억의 인간들에게 요리조리 씹힐 것 아닌가. 하지만, 난 그래도 나와 그녀의 삶 중 하나를 내 멋대로 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택할 것이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21세기 공주님이 아니던가.
어쨌든 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강윤지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뒤통수가 스멀스멀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것에 연연해 할 시간 따윈 없었다. 참을 성 있게 울려대는 핸드폰이 언제 멈춰버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곳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는 우리 팀 직원들 앞에서 전화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봐라. 지금도 화장실을 갔다 온 강 기자가 휘청대며 이리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또! 그렇다고 해서 폴더를 연 후,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아니,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샌들을 신으며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급하게 말했다.
“딱, 딱, 10초만 기다려주세요.”
난 강 기자의 “어디가?”라는 질문을 뒤로 한 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홀로 불빛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 앞에 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려 나 외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열려져 있던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채 입을 열었다.
"네. 백이현 기자입니다."
제발 택배회사나 잘못 걸려온 전화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올 목소리를 기다렸다.
“지금 장난해요?”
수화기 저편에서 짜증과 차가움이 골고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그였다.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오른손으로 급하게 막았다.
“장난한 적 없는데요?”
“10초 기다리라는 게 장난이지 뭡니까? 내가 10초면 얼마를 버는지 잘 알 텐데요?”
‘재수바가지.’ 그럼 넌 화장실 갈 때도, 잘 때도 만날 ‘-10×60×??? = ?????’ 돈 계산을 하고 다닌단 말이니? 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꾹꾹 압축해 눌러 담아 몸 속 어딘가에 일단! 담아두었다.
“미안해요. 회식 자리여서. 그런데 무슨 용건인데요?”
난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도 밀려오는 짜증을 우그러뜨리기 위한 한숨을 두어 번 내쉰 뒤 말했다.
"우리 만납시다."
만나자고? 이 말이 바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그래요. 우리 만나요."
난 온 정신을 그와의 대화에 집중한 후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진. 아직 ‘그쪽’한테 넘어간 건 아니죠?"
"네? 네. 아.직.은. 아니에요."
그는 ‘그쪽’을, 난 ‘아직은’에 힘을 주었다.
"그럼, 토요일 저녁 10시. 하얏트 호텔 10002호에서 봅시다."
"하얏트 호텔이요? 룸?"
하지만 나의 이 마지막 말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말만을 나에게 전한 후 홀로 통화를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누가 봐도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에 급하게 기분이 상해 예민한 자존심이 또 꿈틀거린 난 다시 한 번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첫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난 폴더를 닫아버렸다. 지금은 감성을 배제하고 이성만으로 생각해야 할 때였다. 난 이 전화를 받기 위해 애꿎은 기획을 맡았단 말이다.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
난 가방 안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있는 메모지를 꺼내 가로등에 기대 쪼그리고 앉아 메모를 했다.
'토요일. 하얏트. 10002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