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할리우드에서 가장 팔자 좋은 스타
패리스 힐튼*처럼 펫! 키우기
패리스 힐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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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사랑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나 그 마법 같은 신비로운 시간은 어찌된 일인지 금방 끝이 나버리고 만다.
'회식'도 마찬가지이다. 시작할 땐 모두가 멀쩡한 얼굴,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하나같이 고주망태, 인사불성, 이라는 사자성어를 온몸으로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마법이 풀리는 것도,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이 변하는 것도 모두 당사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사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부식하게 되는 습성을 갖고 있고, 회식의 필수조건인 술의 주성분, 알코올은 사람들을 멜랑콜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렇게 흘러가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되려고 시작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둘 다.
난 지금 ‘플러스 텐’의 회식 자리에서 알코올을 섭취하며 만 일주일간 내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 사건―내가 유상현의 차를 박아버린―이후, 유상현은 전화는커녕, 협박이나 욕설이 가득한 문자 한 통 보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쪽’에 대한 정보를 캐내던 나는 두 눈을 딱 감고 핸드폰에 저장된 그 특종 사진을 '특종'이란 제목으로 보관 메시지함에 안전히 첨부해두었지만 차마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알량한 죄책감이나 윤리, 양심 그런 것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큰 대형사고를 터뜨린 후 정리를 할 만한 마음의 여유, 용기, 객기를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여자인 나의 위대한 직감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했고 그 결과, 난 실연 아닌 실연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태지, 그는 대부분의 남자처럼 여자 입에서 먼저 이별을 말하게끔 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태이가 애인의 변심에 홀로 힘들어하며 결국 이별을 통보하던 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해도 차인 것 같은 그 엿 같은 기분 알아? 눈물 날 것 같아."
그 말을 하는 그녀는 이미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그의 엉뚱한 발언에 눈물은커녕 한마디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이별을 요구하는 편이 훨씬 더 내 정신 건강에 이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인 스타벅스의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잠잠한 정적 속에서 툭 튀어나온, 아직도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그의 말.
"나 커밍아웃 하려고. 그치만 너랑은 계속 친구로 잘 지내고 싶어."
그렇게…… 일 년 동안 내 연인이었던 남자가 돌연 커밍아웃을 선언하면서 더 이상 연인이 아닌 친구로 지내자는 제안을 했다.
coming out. 번역하면 '벽장 속에서 나오다', 즉 동성애자들이 더 이상 벽장 속에 숨어 있지 않고 밝은 세상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사회에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는 앞으로 여자가 아닌 남자를 사랑하겠다는 고백을 한 것이었고 그것은 이별을 요구하는 것을 떠나 지난날 그와 내가 나누었던 사랑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명백한 배신 행위였던 것이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진 남자가 공교롭게도 '게이'라는 이야기를 접한 적은 있어도 사랑을 나누었던―물론, 정신적 육체적 둘 다―상대가 갑작스레 커밍아웃을 선언한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나마 정상적인 이별을 해야 '역시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그래, 니 사랑이 여기까지라니 내가 더 할 말은 없어'라며 드라마틱한 결말을 맺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역시나 동화 속, 아니 모든 이야기는 사랑이 이루어지고 난 그 후를 유심히 봐야 하는 것이다. 아마 '동화 속 공주들의 뒷이야기'에 지금 내 심리 상태를 적용해 생각해보자면 백설공주에게 질린 왕자는 일곱 난쟁이 중 하나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껴 사랑에 빠졌을 것이고, 라푼젤의 그 탐스런 머리는 왕자가 매달려 올라왔을 때의 후유증으로 인한 탈모로 대머리가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왕자는 대머리 라푼젤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 하고 라푼젤보다 더 탐스러운 긴 머리를 지닌 ‘그’를 찾아 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자신의 커밍아웃을 온 나라에 선포했을지도.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했습니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나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 된 상태에서 망상을 끝없이 펼쳐나가다 보면 판단력을 잃어 얼토당토않은 길로 빠지게 된다. 문제다. 병도 약도 없을 만큼 지독한.
"이현 씨는 핑크를 좋아하나 봐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윤지가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한 그녀는 입술을 샐쭉거리며 핑크색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난 핑크색을 사랑한다. 검정은 지루하고, 회색은 우울하다. 그리고 셀러브리티들은 대부분 핑크를 사랑한다고 들었다. 특히! 패리스 힐튼.
"아, 린제이 로한 기사 반응 좋았죠? 이번엔 패리스 힐튼으로 가보는 게 어때요? 아예 셀러브리티 특집을 주마다 만드는 건 어때요?"
갑작스레 시선을 편집장에게 돌린 강윤지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봤다.
"이현 씨가 잘 할 것 같아요."
"네?"
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원하던 것들을 모조리 소유한 그녀들의 수많은 기삿거리들을 보며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하루에도 백만 번씩 모니터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내 모습을 빤히 잘 알면서! 그럼에도 이번 달에는 수치스러운 신용불량자 꼬리표를 달지 않으려고―셀러브리티 이름표를 달지 못한 채 신용불량자 꼬리표를 피해보려 발악하는 게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지 모를 것이다―다시 마우스와 키보드를 부여잡아 보는 나를 알면서!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정말 린제이 로한의 기사만 끝내고 유상현과 케리 팍스의 사진으로 인센티브를 받은 후 다른 종류의 기획을 잡아서 써보려고 했다. 최대한 나의 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을 만한 것. 예를 들면 한방 정보나, 재테크 정보, 생활 건강 등. 내가 최대한 관심 없는, 그렇기에 나의 정신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들 말이다. 내가 애써 웃으며 내 의견을 말하려던 순간,
"그럴까? 좋은 생각이네!"
편집장은 도미 지느러미 한 점을 입에 쓱 넣으며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정말 별 생각 없어 보였다. 도미의 맛을 느끼는 것보다 덜했을 것이고, 젓가락을 움직여 다음에는 뭘 먹을까를 고민하는 시간보다도 짧았을 것이고, 오늘 회식비에 대해 계산기를 굴리는 것보다 뇌의 주름이 덜 잡혔을 것이 분명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만들어 와."
질겅질겅 그녀의 입속에서 도미 지느러미가 조각조각 찢기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나인 듯한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린제이 로한만으로도 힘들었던 내가, 주마다 셀러브리티들과 씨름 아닌 씨름을 해야 한다니. 정말 나는 너덜너덜 찢겨서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사무실의 먼지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난 강윤지를 얄미운 듯 쏘아보며 서둘러 그 기사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하루 종일 벙어리 흉내를 내던 몹쓸 핸드폰이 웅, 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액정을 바라본 난 자그마하게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읊조렸다.
010. ***. ****.
중간 번호, 끝 번호 둘 다 낯선 번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유.상.현.
저절로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갔다. 난 핸드폰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