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구나?"
"그치."
"돈 게 분명해!"
"그런 것 같지?"
"건드릴 사람이 따로 있지."
"역시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그건 당연히! …… 모르지."
얼토당토않은 일을 저질렀을 때, 그래서 숨을 쉴 때마다 그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눈앞에 팟! 하고 선명하게 떠오르며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그럴 때 난!!
홀로 알코올을 체내에 흡수시켜 되도록 말짱한 정신에서 벗어나거나―알딸딸해져서 기분이 좋아짐과 동시에 ‘똘기’도 충만해져 더 어마어마하고 생뚱맞은 일을 저지를 위험이 있음!― 백화점을 돌면서 쇼핑을 하거나―카드 고지서를 봤으니 더 이상은―가까운 친구에게 오롯이 내 입장에서의 '편파적 하소연'을 하거나, 하는 세 가지 대안 중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지금 난 태이네 집에 와 있다.
"너 이 사진, 정말 터뜨릴 거야? 흠. 유상현이 연예 TV에서 그랬잖아. 자긴 케리 팍스랑 인사도 해본 적 없다고!"
한 손으론 내 핸드폰을 들어 그들이 찍힌 사진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입고 있던 원피스의 옆 지퍼를 내리던 태이가 말했다.
"그치. 그러니까 특종이지. 그러고 보면, 나 오늘 대단한 일을 한 거 같긴 해."
"그런 걸 저.질.렀.다.고. 하는 거야."
툭툭 내뱉듯 말하는 얄미운 입술을 소유한 태이의 얼굴이 밉상스러워 보였지만, 굳이 그걸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곧, 블루컬러의 실크 드레스가 주르륵 태이의 몸통에서 다리로 흘러내렸다.
난 태이가 들고 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빅백으로 시선이 갔다. 실크드레스와 빅백. 절대, 네버! '믹스 앤 매치'를 할 수 없는 두 가지 아이템이었다.
"야. 그건 그렇고 그 드레스에 이 빅백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더군다나 너 패션쇼 뒤풀이 갔다 온 거 아니야? 국내 최고 스타일리스트 보조가 뭐 그래?"
"어쩔 수 없었어. 난 어디 가서 앉을 때 배를 가려야 되기 때문에 빅백을 고수해야 해. 안타깝지만, 이건 예의야. 내 맞은편에 앉아 있을 사람에 대한.”
난 요즘 들어 살짝 나온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케리 팍스 같은 여자는 평생 저런 안타까운 이유로 빅백을 들 일은 없겠지? 이상하게도,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들의 몸은 쉽게 중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아니, 잠깐 굴복한다 하더라도 강력한 식이요법과 값비싼 퍼스널 트레이너의 도움 아래 서둘러 중력을 정복하고 만다.
"연락이 올까?"
금세 편안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태이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글쎄? 근데……"
"근데 뭐?"
난, 유상현이 발언한 ‘그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대체 ‘그쪽’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유상현이 몸담고 있는 기획사 스타디움? 아니, 그 둘은 별 다른 문제가 없다는 신빙성 있는 정보를 최근에 들었다. 그렇다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유상현의 실제 애인? 에이. 헤어지고 싶으면 유상현이 먼저 차버리겠지. 게다가―싸가지도 없는―유상현이 그런 사소한 일로 신경 쓸 위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근데 뭐냐니까?"
태이가 재차 물었다.
"아니. 그냥. 화질이 너무 안 좋은 건 아닌가 해서."
"뭐, 좀 어둡긴 해도 누가 누군지는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데 왜? 이거 진짜 특종이긴 하다. 인센티브가 얼마라고?"
태이는 그들이 찍한 사진을 이런 저런 각도에서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뭐, 그러니까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행한 게 아닌가. 하지만 자꾸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이 왜인지, 난 그 찝찝함의 원천인 무엇인지 얼른 밝혀내고 싶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꾹꾹 눌러보았다.
그때, 태이의 손에 들려 있는 내 핸드폰이 불빛을 반짝이며 벨소리를 울려댔다. 그리고 그 순간, 태이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동그랗게 뜬 태이의 그 큰 눈동자에 놀람, 긴장, 떨림, 궁금, 두려움 등으로 가득한 내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누, 누구야?"
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의 손에서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핸드폰 액정에 뜬 글자를 바라봤다.
"누구야? 유상현이야?"
이번엔 태이가 물었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핸드폰 액정에 뜬 번호는 유상현이 아니라 내가 저녁부터 그토록 기다렸던, 장시간 부재중이었던 내 애인 '태지'의 번호였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난 지금껏 그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번호를 확인했을 때도 난 적잖게 실망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이 유상현이 아닌 것에 대해.
난 태이에게 '태지'라고 입 모양으로 중얼거린 후,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말했다. 핸드폰 너머에서 살짝 지친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아. 미안. 일이 좀 있어서.”
“아…… 그래. 뭐, 괜찮아.”
정말로 난 괜찮았다. 아니, 괜찮았었다.
“내일 저녁에 뭐해? 우리 잠깐 볼까?”
그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누군가 말했다. '여자의 직감은 위대하다'고.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내가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귀에 들리는 그의 말투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잠깐!'이라는 단어 또한 문맥상 아니, 연인끼리 만나자는 문장에 썩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