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였다.
케.리.팍.스.
차에서 나와 한 걸음 한 걸음 지금 나와 그가 위치한 곳으로 걸어오는 그녀는 마치, 영화 속에서 막 스크린을 뚫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고백하자면,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의 ‘핫’ 한 여배우를 모니터나 브라운관이 아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인디고 컬러의 데님 스키니를 입고 킬힐을 신은 그녀의 다리는 아찔할 정도였다. 만일 내가 남자라면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신이 직접 하사하신 것 같은 저 다리에 끊임없는 찬사와 입맞춤을 했을 것이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그런 그녀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드디어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흘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훔쳐보며 자신과 비교하는 그 묘한 시선.
사실, 그 순간이 남자가 자신을 볼 때 보다 10배 정도는 더 긴장된다는 사실을 모든 여자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난 나의 다리를 훑고 얼굴로 온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일부러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뭐, 나도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늘씬한 다리, 살짝 올라온 힙, 그리고 창피하지 않을 만큼의 가슴 정돈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녀와 나는 유전적으로 달랐다. 서양인과 동양인이 어찌 같은 신체 구조를 가질 수 있으랴!
우리는 대부분 눈 크고, 코 높고, 볼록한 가슴과 엉덩이, 잘록한 허리, 길게 쭉 뻗은 다리를 지닌 여성들을 보면 ‘바비인형’ 같다며 찬사를 보내곤 한다. 하지만! 바비인형은 원래 서양, 특히나 미국의 산물이다. 그러니 미국 여자들은 모두 바비인형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저 캐리팍스처럼 말이다.
난 힙과 허리에 최대한 굴곡을 줘 ‘S’라인 이란 걸 만들고 싶었지만 맨발로 그 자세를 유지하기란 영 쉽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영어였고 난 중간 중간 그들의 말을 못 알아 들었…… 아니, 중간 중간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대충 해석하자면 나의 존재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더니 도발적인 포즈로 그에게 팔짱을 끼며 그만 가자고 재촉을 했다.
그 순간, 난 내가 이렇게 넋을 놓고 그들의 대화를 해석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 그 기회가 완벽히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있는 저 둘.
한류스타 유상현과 할리우드 여배우 케리 팍스.
한마디로 특.종.
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듣지 못하게 핸드폰을 진동모드로 돌려놓고 버튼을 눌러 '촬영모드'로 맞추어 놓았다.
“저기요……”
그가 홱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찬찬히 입을 열었다.
“왜? 얼마 받을지 생각해봤어? 진작 그럴 것이지.”
그의 말투에는 냉소와 비웃음이 적절이 섞여 있었다.
“너도 참 한심하다. 이깟 돈 받으려고 이런 고생까지 하고. 왜 그렇게 사는데? 하긴, 이런 주제밖에 안 되니 이런 짓을 하는 건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화가 밀려왔다. 물론, 그가 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스타가 아니던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물론, 스타도 같은 인간이기에 사생활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런 모든 사건들이 싫고, 귀찮고, 한.심.하.기.만.하.다.면. 그는 애당초 스타라는 직업을 선택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 경멸에 찬 말투와 눈빛, 그런 그 옆에서 그의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는 케리 팍스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몸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자존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난 오른손을 이용해 그가 들고 있던 수표들을 재빨리 낚아챘다. 그리고 그가 “그래, 그거면 되겠어??”라고 말하며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낼 때 핸드폰을 들어 팔짱을 끼고 있는 그들의 사진을 찍어버렸다.
그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에 당황했고, 난 그 틈을 타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야. 너 뭐하는 짓이야?”
“보면 몰라요? 사진 찍었잖아요. 왜요? 김치 치즈 스마일 안 하고 찍어서 섭섭해요? 다시 한 번 찍을까요?”
이상하게도 한 치의 떨림 없이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뭐? 야! 당장 핸드폰 안 내놔?”
“전, 야가 아니라 ‘플러스 텐’의 기자 백.이.현.이라고 합니다!”
“플러스 텐? 아, 남들 사생활로 연명해나가는 그 허접한 잡지?”
그가 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오면서 물었다. 당장이라도 날 잡아 핸드폰을 빼앗아 던져버릴 기세였다. 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어쩌지? 어쩌지? 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그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부족해? 더 줘? 그쪽에선 얼마 준다고 했는데?’
그쪽?
“그런데! 오늘은 플러스 텐 기자로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이 말하는 그쪽, 그쪽의 부탁이에요.”
모험이었다. 하지만, 모든 모험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쪽이란 말을 듣자마자 멈칫, 했다. 오호라.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아요. 움직이면! 바로 그쪽으로 전송할 거예요.”
“너 지금 나랑 딜을 하자는 거야?”
난 단지 고개만을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선 말을 아끼는 게 최고일 것이란 생각에.
“뭘 원하는데?”
“새…… 생각해볼게요.”
“그럼 지금 당장 생각해.”
“아니요.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할래요."
난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을 쳐 내 차 앞에 다다랐다. 난 꿀꺽, 침을 삼키고 서둘러 내 차에 탔다. 그가 뒤늦게 쫒아왔지만 이미 난 창문을 올리고 자동 문 잠금 장치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가 내 차를 쾅쾅 두드렸다. 난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창문을 조금만 열고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연락하세요.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그의 차를 박기 전과 같이 힘 있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버렸다. 차가 달리면서 백미러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았다.
난 우리나라 최고의 한류스타 유상현을 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힘껏 핸들을 움켜진 손에서 발견한 그것!
수표뭉치.
‘제길. 왜 하필 이건 손에 들고 있던 거야.’
이제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건, 내가 각 나라의 왕자님께 편지를 보낸 것보다 더 무모하고 위험하고 어처구니없는 그런 류의 행동이었다. 린제이 로한이 자신을 광고했던 것보다, 고통을 잊기 위해 하루에 10만 달러(한화 약 9천 980만원)를 쇼핑에 썼던 것 보다 훨씬 더.
넋을 놓은 채, 신호등의 적신호를 보지 못하고 속력을 냈던 나는 뒤늦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하고 멈춰선 차는 유상현의 차를 박았을 때보다 심한 반동을 보였고, 그 바람에 좌석 밑 어딘가에 끼어 있었을 샌들 한쪽이 튕겨져 나왔다.
난 구두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거라도 신고 있었으면 조금은 덜 정신 나간 여자 같아 보였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