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세요."
살짝 열린 창문 틈을 통해 옅은 짜증, 차가운 깍듯함이 배어 있는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이미 나를 떠나 있었고, 그의 오른손은 기어의 위치를 P에서 D로 옮기고 있었다.
그냥 가라니. 말도 안 된다. 만일 이 사고가 정말 나의 실수로부터 발생된 일이라면 쾌재를 부르고 그에게 90도로 절을 하며 서둘러 그를 이 자리에서 떠나보낼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이건 그런 종류의 사고가 아니지 않은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 사고.
난 꼭 이 특종을 잡아 기자로서의 이름도 드높이고, 인센티브도 받아 카드 값을 갚고 어마한 견적이 나왔을 내 차의 수리비도 마련해야 했다. 그러므로 난 그의 배려를 적극 만류하여야만 했다.
난 출발 직전인 차를 볼썽사납게 붙잡으며 말했다.
“마…… 말도 안돼요. 이렇게 그냥 가면 뺑소니인 걸요?”
“신고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가세요.”
“그, 그걸 어떻게 믿어요?”
“왜 못 믿습니까?”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짜증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요즘은…… 그러니까…… 그래요!! 사고가 난 후 괜찮다고 그냥 돌려보내 놓고서 뺑소니로 신고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디선가 이런 사건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흉흉한 세상이다.
그가 창문 사이로 나를 쓱 올려다봤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난 그가 그냥 가버리기 전에 수를 내야했다. 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 이만 가시죠?”
“저도 절.대. 그럴 수는 없다니까요.”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차 앞에 뛰어들었다.
‘끼익.’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고, 난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운전석 문이 열리며 그가 나왔다.
“당신 미쳤어?”
그가 저벅저벅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나 역시 순간 내가 미쳤는지 알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 직업 정신? 엄청난 카드 값으로부터 오는 압박? 그것도 아니면.
"너 대체 뭐야?"
내 앞에 우뚝 선 그가 말했다. 난 그의 포스에 눌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요?”
"그래, 너!"
“가…… 가해자요.”
“해자? 누가 당신 이름 궁금하대?”
‘가’라는 말이 조그맣게 새어 나왔는지 그는 내 이름이 해자라고 알아들었나보다.
“아, 아니요. 가해자라고요. 이 사건의 가해자. 당신은 피해자고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디 기자 아니, 파파라치인데? 아님 누가 시키셨나? 그쪽인가?"
"……"
이 심각한 상황에서 '아, 네. 저 플러스 텐의 백이현 기자라고 합니다'라며 명함을 주고 '당신 모습 파파라치 하려고 차 일부러 박은 거예요'라고 넉살 좋게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가 대답 없는 나를 위아래로 한 번 쓱 훑더니 나의 발 아래에서 시선이 멈춰버렸다. 나도 그를 따라 시선을 나의 발 아래로 이동했다.
그때서야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맨. 발.
맙소사. 아마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영락없이 머리에 꽃을 꽂은 미.친.년일 것이다. 그는 이런 내 모습을 본 후, 자기가 생각한 대로 나에 대해 단정 짓기로 했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수표 몇 장을 꺼내 나에게 들이밀었다.
“이거면 돼?”
슬쩍 봐도 10장은 족히 넘어보였다.
“이게 뭐죠?”
“먹고 떨어져.”
먹고 떨어지라고?
역시나. 업계에서 ‘싸가지’로 소문난 그였다. 하지만 그건 소문일 뿐, 실제로 그런 ‘싸가지’를 봤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소문의 형태가 대부분 그러하듯, ‘내 친구의 친구가 유상현 코디인데……’ 혹은 ‘내 친구의 사돈이 그러는데……’와 같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퍼뜨리고 다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재벌가와 결혼했다는 탑 여배우의 루머처럼. 난 정말, 그 결혼식에 당사자가 갔다 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모조리 지인의 지인, 지인의 지인의 지인! 이었다. 하지만 확실치 않은 증거들로 조합된 추리는 곧 진실의 가면을 쓰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마치 자신이 진짜인 것 마냥.
이것이 풍문, 루머의 여러 가지 속성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난 이제 내 친구들과 사돈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직.접. 겪었는데 유상현 걔 진짜 ‘싸가지’ 없어, 라고.
먹고 떨어지라니.
먹고 떨어지라니.
내가 염소야? 종이를 먹게?
드라마, 영화, 만화에서 숱하게 봐왔던 대사였지만, 이렇게 직접 듣고 보니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웠다. 그래서 얼른 지워내고 싶은데 계속 그 말이 귓가에 윙윙 맴돌았다.
"부족해? 더 줘? 그쪽에선 얼마 준다고 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쪽? 대체 그가 전부터 말하는 그쪽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난 차마 이 상황에서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때. 그의 차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가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