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에 액셀러레이터의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엄지발가락과 발바닥에 내 온 몸의 무게를 실어 힘껏 중력을 가했다. 부웅, 놀란 엔진 소리와 함께 계기판의 ‘알피엠’ 수치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외쳤다.
'만일 유상현의 차가 아니면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쿵!’
할부가 무려 25개월이나 남은 내 차가, 그런 내 차의 다섯 배(?)나 되는 가격의 외제차 뒤꽁무니를 들이받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안전벨트를 맨 나의 몸이 차 앞 유리를 뚫고 나갈 듯 빠르게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욱신,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핸들에 머리를 박지 않아 불필요한 경적소리를 내지 않은 것이, 차 유리에 머리를 박지 않아 얼굴이 피범벅이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둔탁한 무언가로 온 몸을 두들겨 맞은 듯 적잖은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고, 정신이 없는 가운데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이 떨어지면서 와르르르, 가방 안에 있던 물건들도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맥 립스틱, 록시땅 핸드크림, 니베아 데오드란트, 지갑, 선글라스, 등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카메라!’
방금 낙하한 그 가방 안엔 지금 내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난 아찔 거리는 몸 상태를 무시한 채 안전벨트를 풀고 손을 쭉 뻗어 바닥에 떨어진 카메라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카메라 상태를 확인했다.
‘맙소사.’
카메라의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당황한 채 여러 번 재차 눌러봤지만 여전히 먹통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여기 저기 카메라를 어르고 달래 보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배터리 뚜껑이 열리며 배터리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난 의자를 뒤로 쭈욱 밀고 어딘가 숨어 있을 배터리를 찾아댔다. 내가 어수선하게 배터리를 찾는 동안, 방금 내가 들이 박은 차에선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벌써 누군가가 뒷목을 잡고 나와,
“아니,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돈 좀 있어? 이게 얼마짜리 찬 줄 알아?”
라며, 윽박질렀어야 했다. 죽지 않은 이상 말이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사고 가지고 사람이 죽을 리는 없다. 인간의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진다면 인류가 무려 2천 년을 넘게 이렇듯 문명을 유지하며 살아왔을 리가 없다. 그 말은 즉, 저 차 안에 몸을 싣고 있는 인물들은 분명 내가 생각한 두 명이 확실하다는 이야기다. 지금쯤 저들은 충격을 받은 몸을 추스르는 것을 뒤로 한 채,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느라 애 좀 쓰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말이 나오고 있을지도.
‘사고를 당한 사람이 도망가는 건 뺑소니가 아니지?’
물론, 아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 상태로 나를 내버려 두고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내겐 카메라 배터리를 찾을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 안전하게 숨어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3백만 화소. 분명 그들의 모습을 담기에 충분한 화질은 될 것이다. 핸드폰이 무사함을 감사해하며 운전석 문을 열고 왼발을 디디는 순간,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떠올랐다.
나에게 지금 샌들이 한 쪽 밖에 없다는 것.
왼발은 굽 8센티미터인 샌들. 오른발은 제로 굽인 맨발. 이상태로라면 분명 이상한 각도로 뒤뚱거리며 걷게 될 것이 뻔했다. 나는 과감히 왼발에 걸려 있던 샌들을 뒷좌석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맨발로 한 발 한 발 걸으며, 양손에서 계속해서 샘솟는 땀 때문에 느껴지는 축축 찝찝한 느낌을 여름 저녁 시원한 시멘트 바닥의 감촉으로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자기 암시를 걸었다.
‘지금 난 내 직업에 충실할 뿐이야. 다들 선과 악은 한 끝 차이라고 하잖아? 또,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기 나름이라고. 내가 찍게 된 이들의 사진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안 그러면 우리 잡지는 벌써 폐간됐게? 그럼. 결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알 권리가 있어! 난 그 알 권리를 충족시켜 준 대가로 감당할 수 없는 카드 값을 막을 만한 인센티브를 받는 거고. 그래, 이게 자본주의 사회지.’
자기 암시가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가 되어가는 순간, 난 이미 짙게 선팅되어 있는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 있는 누군가가 곤란해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똑똑.’
나는 다시 한 번 창문을 두드렸다. 꼴깍. 두번째 마른 침이 넘어가는 순간,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창문은 정확히 3분의 1만 열렸다. 그 좁은 틈 사이로 다시 한 번 그의 모습이 보였다. 30센티미터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두고 본 결과, 유상현 그가 200퍼센트 확실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허리를 굽혀 창문 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며 말했다.
"저, 괜찮으세요?"
물론, 시선은 이미 확인을 마친 유상현이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향하며.
트레이드마크인 갈색의 긴 생머리.
또 그에 어울리는 오버사이즈 보잉 선글라스.
내추럴한 느낌의 상의.
맙소사!
그녀가 맞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들이 어스름 짙은 새벽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증거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다. 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애써 참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가 눈짓만으로 쓰윽 나를 한 번 훑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그의 귀에 제발 들리지 않길 바라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