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제이 로한의 파티. 풍선. 무지개. 도로의 악 졸음운전, 을 물리친 두 가지 잊고 있었던 기억.
그중 하나는 3시간 전에 베스트 프렌드 태이에게서 온 장문의 문자이다.
‘가방 빌린 거 가져다 놓으러 잠깐 들렸어. 근데 너 카드 고지서 왔더라.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면밀히 투시해본 결과…… 꽤 심각해 친구.’
투시는 개뿔.
태이는 내 이름 앞으로 온 고지서를 본 순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고지서가 든 봉투를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뜯어보았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카드 값을 보고 속으로 '헉' 하며 비명을 지른 후 풀로 다시 봉투를 붙여놨을 것이고. 그러고는 입이 간지러워 나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을 것이다.
대체 어떤 숫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절대적으로 내가 감당치 못할 만큼의 금액이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이 문자를 받은 후 온 몸 곳곳, 심지어 내장기관까지 가득 채워졌지만 회사에서 청구서를 볼 용기 따윈 내게 존재치 않았다. 조심히 가슴을 졸이고 열어보다 이성을 잃을 만한 숫자에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백하자면 집에서 청구서를 본 후 나도 모르게 내지른 비명 소리에 놀란 옆집 아주머니의 인터폰을 받은 적이 종종 있다.
어쨌든, 그건 일단 뒤로 미룬다 치고. 또 하나의 문제!
그것은 바로 애인의 연락 부재였다. 그것도 장차 5시간 하고도 35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이나…… 내가 정확히 문자 2통과 전화 3통을 했지만 단 한 번의 답장도 전화도 없었다. 여전히 소식 없는 핸드폰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침 도로 우측에 편의점이 보였고 난 핸들을 오른쪽으로 힘차게 돌렸다. 정차된 내 차 앞에는 무광택 아우디가 서 있었다. 아마도, 저 차의 차주 또한 편의점에 들르기 위해 차를 세운 것 같았다.
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비상등을 켜고 밖으로 나와 뒷좌석에 던져 놓은 샌들을 찾았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한 짝이 보이지 않았다. 제길, 을 연발하며 핸드폰을 꺼내 든 나는 키패드에 자리 잡은 아홉 개의 숫자 중, 제일 위 왼쪽에 위치한 1번을 검지로 ‘꾸욱’ 눌렀다. 항상 들리던 발랄한 통화 연결음이 약 30초 후 음성메시지 남기라고 요구하는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면 여자 친구들은 백이면 백,
'바람이야, 바람. 지금쯤 딴 여자랑 즐기고 있을 걸?'
이라는 ‘염장성’ 멘트를 마음껏 날린 다음에,
'괜찮아. 남자가 어디 걔 하나니? 야. 즐기고 분명히 다시 돌아와. 중요한 건 그때 너의 태도야!'
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줄 것이 빤하다. 그리고 저희들끼리의 공방이 펼쳐질 것이다. 바로 앞에서 고민과 좌절에 빠진 난 안중에도 없이 나와, 그를 안주 삼아 자신들의 경험담을 반주 삼아 질겅, 질겅. 결코,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고백하건데 난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흔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취재를 하러 간 패션쇼에서 만나 사귄 지 약 1년 되는 남자친구. 이름은 태지. 성은 하필이면 변. 합하면 변.태.지. 하지만 대중적으론 디자이너 TJ(사실, 난 노래방 회사 기계 이름 같아서 그의 닉네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스타일북을 두 권 출간했고, 내가 입사하길 원했던 잡지사에 「style of style」이라는 칼럼을 연재한다. 그리고 가끔은 케이블에서 연예인들에게 스타일에 대한 조언을 하는 리얼리티쇼의 게스트로, 혹은 보조 MC로 출연하기도 한다. 그러니, 인터넷에 '디자이너 TJ‘라고 치면 그의 약력이 주르륵 뜨는 것은 당연하다.
난 그를 90퍼센트 모자란 셀러브리티 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찾는 왕자님과 꽤나 멀지만 적당히는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한 달 수입이 나의 10배나 된다는 사실과 가끔 협찬받은 백이나 구두, 티셔츠 등을 나에게 선물하기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절.대.
그의 섬세함과 다정함, 스타일리쉬함 그리고 다른 여자를 바라보지 않는 왕자님 같은 곧은 절개가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근데, 왜 연락 두절이람. 정말 바람이라도 난 걸까?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피부의 적이다.
분명, 감기에 걸려 약을 먹은 채 정신없이 자고 있거나, 갑작스런 촬영이 생겨 '나'라는 존재도 잊고 카메라 앞에서 죽어라 떠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핸드폰을 변기에 떨어뜨려 드라이기로 다섯 시간 째 말리고 있을지도. 암. 그럼, 그럼. 그게 분명하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스스로를 무장한 후, 다시 한 번 샌들을 찾아보려 하는 찰나! 내 두 눈에 양 손에 커피 캔을 하나 씩 들고 오는 남자가 들어왔다.
185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D&G 마를린 먼로 티셔츠 안에 숨겨져 있지만 속속들이 비춰지는 기나긴 노력의 대가 '잔' 근육들.
빛바랜 ‘진짜’―오리지널―빈티지 선글라스 안에 가려진 외모.
아니,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부할 수 없는 아우라.
난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눈앞에 있는 저 남자의 정체를.
그는 분명 최고의 한류 스타 유상현이었다!
일반인은 결코 저 정도의 아우라를 가질 수 없다. 연예인들을 상대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제일 처음 느낀 것이
‘그들은 일반인과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였다.
그가 내 차 앞에 정차되어 있는 무광택 아우디로 걸어갔다. 그러던 중 그 차의 조수석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팔을 내밀었고, 남자는 운전석으로 가던 도중 여자의 팔에 커피 캔을 쥐어주었다. 유독 흰 그 여자의 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설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한류 스타 유상현이 할리우드 여배우 케리 팍스와 호텔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루머.
'사진작가인 갈로 라미레즈(24)는 지난 31일 오후 곧 개봉할 〈허비-폴리 로디드〉의 여주인공이자 10대의 우상인 린제이 로한(18)이 타고 가던 스포츠카를 들이 박았다.'
라는 린제이 로한의 기사. 물론 그 기자는 일부러 린제이 로한의 차를 박은 것이고!!
그리고!! 특종을 잡으면 준다는 인센티브.
바로 그거였다. 이것은 어쩌면 내게 행운, 아니 기회였다. 신데렐라가 '비비디바비디부'를 외치는 마법사를 만나 호박마차를 타게 될 기회를 얻은 것과 같이, 백설공주가 자신과 왕자를 만나 해줄 매개체인 사과를 덥석 받게 된 것과 같이!
하지만 모든 '기회'에는 위험부담이 따른다. 신데렐라는 마법사의 선·악을 완벽하게 판단하지 못한 채 언제 폭삭 무너질지 모를 호박마차를 탔으며, 백설공주는 사과를 먹고 영원히 죽을 수 있는 가능성, 기절해 있는 자신에게 키스를 한 사람이 왕자가 아니라 일곱 난쟁이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위험을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난 태지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저들이 탄 차를 있는 힘껏 박아버리는 것! 난 재빠르게 다시 내 차에 탔다.
난 찾지 못한 샌들의 주인인 오른 발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을 준비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