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씨 아직 멀었어? 나 먼저 가. 수고."
모두가 퇴근해버린 후 적막감이 바닥에 흥건한 이 공간의 마지막 동지였던 '강윤지'가 형식적인 인사말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강윤지.
'플러스 텐'의 일등공신 기자. 회사 내에서 그녀의 별명은 명(明)파파라치였다.
한 달 전, 그녀는 시대를 풍미하던 여가수 A가 자신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린 남자와 프랑스 니스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찍어왔다. 그리고 2주 전에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녀 그룹의 멤버 중 한 명이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청담동에 위치한 일본식 선술집에서 사케를 마시고 있는 장면도 사진에 담아왔다. 물론, '빅 프레임 선글라스 매칭술'로 정확히 '그녀' 라고 단언 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에겐 스타의 가십을 찾는 촉수가 남다르게 발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님, 명탐정 김전일이 가는 곳곳마다 '살인사건'이 터지는 것과 같이 명파파라치 강윤지가 가는 곳마다 '가십거리'가 발생하는 것일지도. 세상은 아직 과학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 백이현은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웠고, 또 그녀가 가진 행운이 나에게도 와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가 부재 중일 때, 그녀의 책상을 몰래 훔쳐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흔적 따윈 그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책상, 데스크탑 안의 바탕화면, 인터넷 익스플러어의 즐겨찾기도 그녀의 얼굴, 스타일, 성격처럼 깔끔 명료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자기 관리, 자기 방어가 확실한 여자였다. 내 모니터 안에 가득 떠 있는 린제이 로한과 전혀 다르게 말이다.
홀로 남은 지 약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난 드디어 '환경이 너무 열악해'라는 변명으로 특집기사를 급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위로 혹은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완성된 기사를 첨부시킨 메일을 편집장에게 보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분께선 우리나라 탑 스타의 100배 정도 되는 가십 거리들을 만들었더라고요. 아, 물론 당신 말대로 이런 분들 때문에 저도 당신도 먹고 사는 거지만요. 그럼, 편안하지 못한 밤 되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라며......"
라는 메시지는 물론, 마음속으로만 보내고!
드디어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특급 지인으로부터 5년 할부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구입한—그러니까, 한 달에 35만 7천 원씩 갚아나가는 중인—노란색 풍뎅이 차에 지친 몸을 실었다. 굽이 8센티미터나 되는 샌들을 벗어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나는 맨발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장시간의 타자질로 끝부분이 살짝 벗겨진 네일이 도드라지는 손으로 핸들을 돌렸다. 문득, 계기판의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출근 시간 9시.
제길, 한마디로 난 반나절이 넘도록 린제이의 가십들과 씨름 아닌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도 쯤 이면 꿈에 린제이가 나와, '이봐. 넌 나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그러니…… 죽어줘야겠어.'
라며, 난장판인 파티장 한 구석으로 날 끌고 가 손발을 묶어놓은 채 입속으로 무언가를 대책 없이 밀어 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엑.스.터.시.'일 것이다.
파티 걸에, 대마초 흡연 혐의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던 그녀가 한국의 일개 잡지 기자에게 배짱 있게 군다고 해서 그 누가 말릴쏘냐. 특히, 편집장은 깔깔 웃으며 린제이가 더 자극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열심히 부추길 것이다. 그리고 '플러스 텐'의 명파파라치 강윤지는 그 장면들을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찍겠지?
그러는 동안에 난 엑스터시 과다 복용으로 해롱해롱거리며 내 눈에만 보이는 갖가지 형형색색의 풍선과 무지개를 손에 쥐어보려 뜀박질을 할 테고, 그렇게 미쳐 뛰어다니다가 온 몸에 힘을 잃은 채 서서히 시름시름 앓다 죽어갈 것이다. 아마도 죽어가면서 난 이루지 못한 내 꿈과, 열심히 찍어대고 있는 강윤지의 저 사진기 안에 담긴 내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겠지.
이게 무슨 헛소리람-
역시, 적당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잠을 자지 않고 말랑말랑한 꿈 아닌 꿈을 꾸는 것은, 그리고 그것도 운전 중이라는 건 절대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잠시 잊고 있었던—망상 속의 졸음운전보다도 더 큰 문제들을 떠올리자마자 거짓말처럼 풍선도, 무지개도, 린제이도 사라져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