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예쁜 편지지?”
“네. 제일 예쁜 편지지요. 굉장히 중요한 곳에 보낼 편지거든요!!”
나는 평소 애용하던 팬시점의 아저씨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추천 해준 편지지들을 한 10개가량 퇴짜를 놓고서 가슴 깊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이런 것밖에 없어요?”
“대체 어디다 보내려고 하는 건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어?”
난 아저씨의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진열대에 디스플레이 된 편지지들을 계속해서 훑어보았다.
“다 별로예요. 일국의 왕자님한테 쓸 편지란 말이에요!”
이 말을 들은 아저씨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왜냐면 얼른 다른 팬시점에 가려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그 팬시점을 다시 찾을 때마다 아저씬 나를 약간 모자란 아이를 동정하듯,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며 신경을 써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여러 군데의 팬시점을 전전한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편지지를 구입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당연히 ‘FROM’은 ‘이현’이었고, ‘TO’는 왕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각국의 ‘왕자님’들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창피함과 쑥스러움으로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지만 그 당시의 나로서는 용돈 인상을 추진하는 일보다 열 배 이상 더 진지했던 것 같다. 장장 7시간에 걸쳐 쓴 편지 10통과 가장 예쁘게 나온 내 사진을 편지봉투에 함께 넣어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나름 거금을 들여 편지들을 해외 발송으로 보낸 후 맘껏 뿌듯해하며 잠들었었는데!
그날 이후,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반년이 가도 그토록 애가 타게 기다리는 답장은 오지 않았다. 결국,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내 편지를 무시한 왕자들의 거만함을 원망하며, 드디어 공주가 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배스킨 라빈스에서 새로 나온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우편함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편지봉투 두 장을 발견했다. 그 순간,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다. 편지봉투 겉면에 적힌 주소가 한국어가 아닌 영어였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영어로 된 편지가 올 일은 없었다. 내가 왕자님께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 말고는!
편지들을 가슴팍에 소중하게 품고 집으로 들어간 나는 왜 이제야 집에 들어오냐는 엄마의 잔소리에,
“엄마! 앞으로 나한테 잘 보여야 할걸? 어쩜 내게 존댓말을 써야할지도 몰라.”
라는 정신 나간 발언을 한 후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서둘러 오디오 전원을 켜고 평소 즐겨 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꿈은 이루어지리라, 반드시!’
나는 명언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쓸 때 사용했던 두꺼운 영어사전을 다시 펴고 답장의 내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씩 머리를 쥐어뜯으며 해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편지는 아랍의 밀리어네트 왕자에게 온 것이었는데 내용인즉, “사진을 보니 당신이 마음에 든다. 그리하여 나의 12번째 왕비의 자리가 비었으니 당신이 나의 12번째 왕비가 되어주었으면 한다”라는 내용이었고, 그리고 또 한 통의 편지는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왕자님이라 했는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왕자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호주에 붙어 있다. 언어는 왕 자신이 만든 이상한 문자를 쓰며, 땅 면적은 집과 안뜰이 국가 전토인 나라이다. 총인구가 7명으로 육군과 해군이 있으며, 공군은 조직되어 있지 않다. 육군은 병력 2명(대통령과 그 아들) 해군도 단 2명뿐이다. 한마디로 가족과 친척들만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이런 나라의 왕자라도 좋다면 난 충분히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총 5시간의 독해 끝에 해석한 편지의 내용이 겨우 이따위라는 것에 대해 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런 나라의 공주가 되느니 차라리 그 꿈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약 3년 후,
시대가 변하면서 공주가 되고픈 나의 오래된 꿈을 대체할 수 있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트렌드 아이콘인 ‘셀러브리티’라는 새로운 키워드가 탄생했다.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는 트렌드세터*인 이들의 영향력은 점차 커져 셀러브리티 워너비**들이 속속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 트렌드세터하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떠오른다. 물론 본질은 서로 전혀 다르지만, 말하자면 트렌드세터는 유행을 따르려는 무리들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자인 셈이다. 그들이 입고 나온 옷은 다음 날 매장에서 품절 사태를 이루고 제품을 만든 디자이너의 이름 대신 ‘OOO 스타일 자켓’, ‘OOOst 선글라스’ 등으로 통용될 만큼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큰 존재이다. |
** 셀러브리티들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매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요즘 세상엔 그 ‘매력’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셀러브리티 워너비들이 늘고 있다. 셀러브리티가 하고 나온 아이템이나 그 셀러브리티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보다 비슷해 보이려고 노력한다. 셀러브리티처럼 예뻐지길 혹은 멋있어지길 바라는 와중에도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짝퉁’으로 끝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셀러브리티.
한마디로 그녀들은 21C공주였다.
난 결심했다.
오드리 햅번, 제클린 케네디부터 제니퍼 로페즈, 페리스 힐튼, 안젤리나 졸리 그리고 린제이 로한 같은 ‘셀러브리티’가 되자고! 그녀들은 명품 백, 근사한 남자들을 모조리 사로잡고 자국의 여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결심을 한 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난 벌써 스물여섯. 셀러브리티……가 되기는커녕 셀러브리티를 취재하거나 파파라치 짓을 해서 먹고 사는 매거진 《플러스 텐》의 '기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왕자님의 공주가 되어 근사한 삶을 살고야 말겠다는 그 허영의 거품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성숙한 여자들이라면 한 달에 한 번 겪는다는 카드 값의 공포를 느끼고, 끊임없이 다이어트에 매진하며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렇게 날 공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최고의 남자를 계속해서 찾아나가고 있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