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아름답지 못한 장면을 봤구나.”
“그러게. 쯧쯧.”
두 분이 만담의 장단이라도 맞추듯 그렇게 말한다. 심각한 표정인데 말투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 여전히 아버지는 밤알을 까고 어머니는 뜨개질 바늘을 움직인다. 이럴 때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치 부조리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같기만 하다.
“어쩌지요. 달구가 남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다시 묻자, 어머니가 한숨을 쉬듯 말한다.
“사실 나도 달구 새엄마랑 계씨 형이 모텔을 드나드는 걸 봤다. 지난주였던가, 옥상에 올라가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두 사람이 모텔에서 나오는 게 훤히 보이더라구.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자세히 봤는데, 틀림없었어. 모텔 앞에서 딱 헤어져서는 남자는 계씨네 오토바이 상회로 들어가고 여자는 달구네 식당 쪽으로 가던데 뭐.”
아, 그랬구나. 오늘 내가 본 게 계씨 형과 달구 새엄마가 확실하구나.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은밀하게 모텔에 간 게 오늘이 처음인 것도 아니구나.
“쯧쯧, 입에 담기 민망한 얘기지.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건지.”
아버지가 아직 껍질을 벗겨 내지 않은 밤톨들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TV의 연속극에서 나오는 소리가 중간중간 끼어들었지만 방안의 분위기는 할 수 없이 가라앉고 만다.
“오늘도 상문이가 두 사람이 모텔에 들어가는 걸 봤다면 두 사람 관계가 심상치가 않은 것 같은데 만세 아버지에게 일단 알리는 게 어떨까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과 눈동자는 아이의 것처럼 맑기만 하다. 무리만 아니라면 나는 감히 내 어머니에게 구김살이 없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지금 내 어머니의 얼굴이 딱 그러하니까 말이다. 잠깐 뜸을 들인 아버지가 입을 연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나도 잘 판단이 안 서는구만. 달구 아버지 그 사람, 순하긴 해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거든. 동네 사람들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가 고집을 부려서 그 여자랑 살림을 합쳤는데, 그런 여자가 자기 몰래 부정한 짓을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 어리석은 생각 같은 걸 할지도 모른다구.”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어머니는 그렇게 물었지만 모르고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자진하여 치명적으로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 따위 말이다.
“음, 지금으로선 조금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 여자가 한 번만 더 부끄러운 짓을 하면 내가 직접 그 여잘 만나서 알아듣게 이야길 해야겠어요.”
어머니가 잠시 뜨개질 바늘을 손에서 놓고 손목께까지 흘러내린 스웨터를 걷어붙인다. 그것이 마치 결의를 다지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아, 왜 이런 일로 내 어머니가 분개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순하디순한 내 어머니로 하여금, 포획용 그물을 짜게 만드는가. 세상은 왜 그런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괴롭다. 사랑만으로 충만한 세상은 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안방에서 나와 내 방문을 연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문자가 두 통이 와 있다. 하나는 달구의 번호인데, 또 하나의 번호는 처음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번호가 알 수 없게도 눈을 찌르듯 불쾌하게 느껴진다. 먼저 달구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다.
‘형, 옥희 누나가 형에게 대신 문자를 보내 달래요. 오늘 정말 즐거웠다고,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잘 쉬고 잘 자라고 전해 달래요. 하하. 오늘 두 분 정말 좋은 시간 보냈나 봐요. 다음에 만나면 얘기해줘요. 잘 자요. 형.’
저절로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느낀다. 달구에게 거리낌 없이 대신 문자를 보내달라고 한 걸 보면 내 사랑 옥희 씨는 정말 사랑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구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옥희 씨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이 당당한 사랑이 나를 성찰하게 하고 나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 이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나는 깜박 잊고 있던 모르는 번호로부터 와 있는 문자를 확인한다.
‘상문, 나야 만세. 나 아까 저녁때 우연히 너랑 우리식당 여자애랑 분식집에 들어가는 걸 봤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 음, 재밌네.’
아, 그건 만세로부터 온 문자다. 모르는 번호, 이상하게 눈을 찌르듯 불쾌감을 안긴 번호는 만세의 번호였던 것이다. 메시지의 내용 역시 불량하고 껄렁하기 그지없다. 나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이것은 시인의 분노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 사랑을 옹호하고 사수하고자 하는 시인의 분노다. 그러므로 이 분노는 순결하면서도 결사적이다.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거침없이 답문자를 보낸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네까짓 게 이 사랑을 어쩌겠다고.’
문자가 송신됐음을 확인한 나는 주먹을 불끈 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문자가 온다. 예의 만세의 번호다.
‘후훗.’
단지 그것뿐이다. 나는 이번에는 무시하기로 한다. 비겁을 감추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저열한 비웃음 따위에 대꾸할 필요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