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거기에 미친 나는 조심스레 옥희 씨에게 묻는다.
“옥희 씨, 혹시 달구나 달구 아버지도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러자 옥희 씨가, 살짝 수심이 깃든 얼굴로 대답한다.
“글쎄요, 아저씨나 달구나 모두 속이 깊잖아요. 더군다나 아저씨는 워낙 말수가 적어서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혀 모르고 계시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알고 있지만 내색을 안 하신다는 거군요.”
“네, 아마도요.”
옥희 씨의 얘긴즉 달구와 달구 아버지도 달구 새엄마의 수상쩍은 행동을 모르고 있진 않을 거라는 거다. 아, 무언가에 실컷 우롱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떨떠름하고 맵기만 하다. 하지만, 이 기분에 계속 젖어 있을 수는 없다. 오늘은 사랑하는 옥희 씨와 처음 데이트를 한 날이 아닌가. 그래 좋은 것을 먼저 생각하자. 나쁜 생각은 발밑에 던져두자.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녁 달빛이 참 곱네요. 그렇죠?”
“네, 그래요, 우리 좋은 것만 생각해요.”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옥희 씨가 그렇게 대꾸를 한다. 정말이지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헤아리는 내 사랑이 귀하고 고맙다.
옥희 씨를 집에 바래다주고 집에 들어오니 저녁 여덟 시쯤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약방문을 닫고 2층 안방으로 올라오셔서 TV를 보고 계신다. 요즘 한창 인기가 있는 일일드라마다. 어머니는 여전히 뜨개질바늘을 손에 들고 계시다. 눈으로는 TV 수상기를 보고, 손으로는 뜨개질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 역시 가만히 계시지는 않는다. 손으로 바구니에 든 햇밤을 깎고 계신다. 손을 가만히 놀리고 있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오랜 습관이다.
딱 한 번 들은 이야긴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을 하면서 첫 살림을 꾸릴 때 부모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친가나 외가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닌 말 그대로 수저 두 벌과 이불 한 벌만 가지고 살림을 시작했다고. 그때는 거개가 다 그런 시절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서얼 출신이어서 자라면서 많은 설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하지만 꿋꿋하게 공부에만 전념해서 보란 듯이 한의사까지 되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분(나는 그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의 두 손을 꼭 붙잡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처녀 적 새마을금고에서 경리를 보고 있었단다. 그런데 매달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적은 돈이라도 적금을 하는 아버지의 성실함에 반해서 어머니가 먼저 호감을 고백했다지. 그런 두 분이 지금 안방에 앉아 뜨개질과 밤을 까며 연속극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말없이 두 분 사이에 끼여 앉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얼굴이 반색이었던지, 어머니가 넌지시 묻는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사랑이란, 어머니에게 밝히지 못할 종류의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대답을 한다.
“사실 어머니,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그 사람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어요.”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도 생밤을 까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오호, 대단하네. 그래 즐거웠니?”
“네, 저도 그 사람도 모두 즐거웠어요.”
이번에는 아버지가 끼어든다. 껍질이 다 발라져서 맨살을 드러낸 밤 한 톨을 내 입께에 내밀면서다.
“이것 좀 먹어봐. 여간 씨알이 굵은 게 아냐. 그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다만, 뭐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나는 아버지가 내민 밤톨을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밤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그럼요. 곧 두 분께 인사시켜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오호,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려야겠다. 그런데 너 또 다른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머니가 고개를 바짝 숙이며 내 눈을 들여다보시며 말한다. 아, 어머니는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 구석구석을 샅샅이 들여다보실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내 어머니인가. 나는 내심 옥희 씨를 바래다주던 길에 본, 달구 새엄마 생각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복잡하던 찰나였다. 그래, 어머니와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대책을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 사실은 집에 오다가 달구 새엄마랑 계씨 형을 봤어요. 두 사람이 글쎄… 사거리에 있는 모텔에 들어가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