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분식의 할머니는 예전보다 많이 늙으셨지만, 떡볶이는 예전의 맛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시고는 오랜만에 왔다며 평소보다 훨씬 푸짐하게 떡볶이를 담아주셨다. 김밥도 우리만을 위해서 새로 싸서 주셨는데, 햄을 하나 더 넣어주셨다.
“너무 맛있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옥희 씨는 떡볶이와 김밥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성찬이라도 되는 양. 나는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좋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옥희 씨의 앞 접시에 오뎅을 집어서 건네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달구의 번호가 뜬다. 녀석, 나와 옥희 씨가 되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상문이 형, 뭐하고 있어요? 옥희 누나와의 데이트는 재밌어요?”
“응, 그래. 좋은 시간 보내고 있어. 지금은 같이 떡볶이 먹고 있어.”
나는 여전히 맛있게 떡볶이를 먹고 있는 옥희 씨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한다.
“와, 떡볶이 맛있겠다. 옥희 누나가 떡볶이 얘길 많이 했는데. 나는 하루 종일 책을 읽었어요. 예전에 형이 빌려준 책요.”
내가 예전에 빌려준 책이라면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일 것이다. 녀석은 그 책이 어렵다고 툴툴거리면서도 꼭 끝까지 읽고야 말겠다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슬픈 열대>는 교활하고 영악한 문명의 폭력과 속임수에 점점 더 망실되어 가는 순수의 자존심을 여전히 옹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그 의미와 소용에 동의한다면, 그 책은 누구에게나 조금도 어려운 책이 아니다. 순정한 책에 씌어 있는 모든 텍스트의 속성이 그러할 것이다. 순수한 요구끼리는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랬구나. 잘했어. 그 책 어서 읽으렴. 너에게 빌려주고 싶은 책이 참 많아.”
“그래요, 형. 남은 시간도 즐겁게 보내고, 다음에 만나면 오늘 어땠는지 자세히 얘기해줘요.”
그러면서 달구는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방해하지 않으려는 녀석의 배려일 것이다.
“달구예요?”
옥희 씨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여전히 떡볶이를 입에 가져간다. 그런 모습이 참 예쁘다. 옥희 씨는 결국 떡볶이와 김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옥희 씨처럼 떡볶이와 김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녀의 입술에 묻은 고추장 소스를 닦아주고 싶지만 아직은 용기가 없다. 대신 나는 손짓으로 내 입술을 가리키며 옥희 씨에게 입술을 닦으라고 일러준다. 옥희 씨가 수줍은 듯 웃으며 냅킨으로 입술을 닦는다. 다음에는 꼭 내가 닦아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사소한 다짐을 한다. 할머니에게 떡볶이와 김밥 값을 치를 때, 기어이 옥희 씨가 자신의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낸다. 나도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옥희 씨와 나는 서로 돈을 빨리 꺼내려고 시합이라도 하는 것 같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밉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찬다.
“이런 이런, 누가 연애초짜들 아니랄까 봐, 둘 다 똑같이 3천 원씩만 내.”
할머니 역시 우리가 서로 좋아하고 아끼는 사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다. 할머니가 정한 원칙대로 나와 옥희 씨는 똑같이 돈을 낸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내렸다. 이 어둠마저도 지금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그녀와 내가, 비록 짧았지만 처음으로 함께 하루를 보냈음을 이 어둠이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이 상상 속의 일이 아니었다고, 꿈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래, 이건 꿈이 아니다. 이 사랑은 현실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일이다. 이 얼마나 벅찬 사실인가.
“아쉽지만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일 또 아침부터 손님들을 맞으려면 저녁에 부식거리를 준비해둬야 하거든요. 덕분에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장난스레 옥희 씨에게 되묻는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나요?”
그러자 옥희 씨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한다. 아, 저 순수를 어쩔 것인가.
“우리가 탄 버스도 좋았고, 절집에서 본 우물도 좋았고 스님의 말씀도, 스님이 우려낸 차도 좋았어요. 그리고 떡볶이도 좋았구요. 당신도 즐거웠나요?”
“그럼요, 나도 즐거웠어요.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 1분 1초가 다 좋았어요.”
“아,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하하하.”
옥희 씨가 웃는다. 옥희 씨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헤어지면서 웃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싫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우리가 믿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