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들어갈까요?”
옥희 씨가 수줍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일주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그녀는 자신의 측은한 마음이 내게 전해질까를 저어하는 기색이다. 공연히 내 마음이 쓰일 것을 염려하는 까닭이다. 그 가난한 마음을 읽은 나도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인다. 절 마당 안에는 등산복 차림을 한 대여섯 명 정도의 행락객이 대웅전을 둘러보고 있을 뿐, 여느 때처럼 고즈넉하고 단정한 분위기다. 나는 옥희 씨를 우물 쪽으로 이끈다.
“옥희 씨, 우리 우물 먼저 봐요. 이 절집 마당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필시 설렘이 잔뜩 묻어났겠지만,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었다. ‘혹시 우물물이 마르지는 않았을까?’ 절을 찾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의심 한 조각이 슬그머니 내 의식 한 켠의 꼬리를 잡고 매달리듯 떠오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와 함께 꼭 우물물에 얼굴을 비춰보고 싶다는 발원, 우물로 하여금 내 얼굴과 내 사랑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는 발원이 어떤 조급증을 안겨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비가 안 온 지도 적이 보름 이상은 된 것 같다.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옥희 씨와 함께 우물 쪽으로 다가간다. 곧 옥희 씨와 우물 앞에 당도하는 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한다. 그러자 옥희 씨도 내 마음의 조바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따라 심호흡을 한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는 살짝 웃는다. 이제 우물을 보는 일이 남았다. 함께 우물을 보며 우물의 눈과 마주쳐야 한다. 옥희 씨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우물 안쪽을 바라본다.
아, 그곳에 두 사람의 얼굴이 동그랗게 떠 있다. 물은 푸르고 충만하다. 우물물이 마르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은 한낱 기우였다. 푸른 우물물 안에 사랑의 기운으로 한껏 상기된 젊은 연인의 얼굴이 떠올라 있다. 우리가 눈을 끔벅거리며 그 얼굴을 바라본다. 우물 내벽 돌 틈에 피어 있는 이끼들은 마치 젊은 두 연인의 사랑의 선도를 보증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우물에 비친 내가 웃는다. 그러자 옥희 씨도 웃는다. 나는 우물 안에 대고 작게 소리친다.
“옥희 씨, 당신을 사랑해요.”
그 목소리가 우물 안에서 맴돌며 공명을 일으킨다. 옥희 씨가 대답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나와 옥희 씨는 우물 안에 가득 공명된 소리에 눈을 씻고 귀를 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사랑으로 깨끗해질 것이다. 사랑으로 깨끗해진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우물 안을 맴돌던 사랑의 소리가 서서히 잦아질 즈음에서야 옥희 씨와 나는 우물 안쪽으로 구부렸던 고개를 든다. 옥희 씨의 얼굴이 한결 맑아진 것 같다. 그녀의 두 뺨이 흰 대리석처럼 은은한 빛을 발한다. 내 얼굴 역시 그랬을까?
“이 우물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옥희 씨가 여전히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우리의 첫 번째 우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것은 첫 번째군요.”
“네, 맞아요. 우리는 오늘 첫 번째 일요일을 가지게 되었고, 첫 번째 버스를 탔으며, 첫 번째 일주문을 통과했고, 그리고 방금 첫 번째 우물을 만난 거예요.”
모든 ‘첫 번째’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독점적이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으로 종료되고 그것으로 완결되는 것이다. 첫 번째는 모든 존재의 의미를 물을 때, 그 기원에 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것이다. 하물며 한 존재의 절대적 운명을 결정짓는 사랑과 관련된 것임에야.
“나는 그것들을 상문 씨와 함께 겪어서 기분이 좋아요.”
아, 옥희 씨의 말은 나로 하여금, 내가 밤하늘의 별을 비추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로 우뚝 서게 하는 것이다. 옥희 씨는 나를 자신의 절대적 타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시간들이 예비되었던 것 같아요.”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 앞에서 확신하는 말만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