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버스가 온다. 옥희 씨와 나의 첫 번째 버스가 온 것이다. 옥희 씨와 나는 버스에 올라탄다. 승객은 나와 옥희 씨 외에 대여섯 명뿐이다. 일요일 오후 교외로 나가는 버스는 한적하고, 한적해서 한결 여유롭다.
“자, 출발합니다.”
나이 지긋한 기사님이 유쾌한 목소리로 출발을 알린다. 과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옥희 씨와 나란히 앉아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행복한 충만감이 몰려든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모든 풍경들, 이를테면, 농가의 지붕과 양곡조합장의 간판과 노랗게 벼들이 익어가는 논과 가로수와 전신주들이 일순 정지해서는 차창을 두드리면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다. 내 귀에 그들의 인사말이 들린다.
“축하해요, 당신들의 사랑을.”
흔하고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마뜩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좀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내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가 옥희 씨를 내주는 조건으로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절대로 그 거래에 응하지 않을 생각이다. 무엇과도 옥희 씨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옥희 씨가 바로 내 세상이라고 나는 이미 믿고 있기 때문이다.
30분 정도 지나고, 나와 옥희 씨는 버스에서 내린다. 그녀가 버스 발판으로 발을 내디딜 때,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피하지 않고 손을 잡는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 아, 그러면 그렇지, 딱 알맞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딱 알맞은 온도다.
“와, 한적한 시골길이네요.”
옥희 씨가, 버스가 지나간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네, 맞아요. 포장이 안 되어 있어서 먼지가 좀 일기는 하지만, 참 상쾌하죠?”
“네, 먼지야 뭐 버스가 멀리멀리 가면 금방 가라앉을 텐데요. 정말 기분 좋은데요.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아요. 매일 식당에서만 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이런 교외에 나와 봤어요. 다 상문 씨 덕분에요. 당신은 고마운 사람이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정말 기분이 좋아요. 자 그럼 우리 함께 걸어요.”
그런데, 그녀와 나는 아직까지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잡았던 손 말이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 이파리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쳐주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걷는다. 앞선 자도 없고 뒤를 따르는 이도 없다. 시골길을 걷고 비스듬히 경사를 진 산길을 걷는 동안에도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처음부터 붙어 있던 손처럼.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절집의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에 다다르자 옥희 씨가 사천왕상을 향해 합장을 한다. 나도 사천왕상을 향해 합장을 한다. 합장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잠깐 손을 놓은 것이다.
“사천왕상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되게 험상궂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옥희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아버지가요. 저랑 함께 살 때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당신이 죽으면 사천왕이 되고 싶다구요. 비록 험상궂고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악한 자에게 벌을 주고 선한 자에게 상을 주는 사천왕처럼 당신도 착하고 바른 것들을 돕고 싶어 했거든요. 선하고 바른 자는 조금도 사천왕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오직 악한 자들만이 사천왕을 무서워할 뿐이죠.”
옥희 씨 아버지 얘기는 나도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을, 탐욕과 이기심과 쾌락으로 가득 찬 탁한 곳이라고 부정하면서 하나뿐인 딸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채 홀로 가르쳤고, 평생 동안 자업자득만 하다가 어느 날 딸을 두고 홀연히 먼 길을 떠났다는 옥희 씨의 아버지. 아, 지금 옥희 씨가, 일주문을 지키는 사천왕 상 앞에서 평소 사천왕이 되고 싶다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의 손이 가서 옥희 씨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옥희 씨가 측은하게 느껴져서가 아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옥희 씨의 마음을 나도 나누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