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그럼 저도 한마디 해볼게요.”
저쪽에서 수제비 그릇을 두 손에 쥔 채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달구 아버지가 수제비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특유의 저음으로 입을 연다. 그가 입을 열자, 산이 움찔거리는 것처럼 일순 실내의 공기가 바뀌는 것만 같다. 워낙 몸집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비둘기, 사실 저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 답답해요. 그 작은 것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거든요. 작은 것들은 정말 상대하기가 어려워요. 무슨 수를 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거든요. 우리 집사람 얘길 하셨는데, 집사람 말을 들으면 전부 집사람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이곳에 와서 이야길 들으면 여기 계신 분들 사정이 이해가 된단 말이죠. 제가 워낙 둔하고 느려서 그런지, 마땅히 무엇이 옳고 그런지를 판단할 만큼 사람들이 기다려주질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달구 아버지는 돌연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금방이라도 알전구 같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이다. 그 큰 사람이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자 어른아이의 얼굴과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 어른들은 달구 아버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하면서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충분히 다 알아들었다. 크고 느린 자가 가지는 적막과 비애와 무기력함을 말이다.
“음, 그렇게라도 자네 속마음을 말해주니 고맙네.”
아버지가 애써 달구 아버지의 슬픈 표정을 외면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이쯤 되면 오늘 회의도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몰래, 슬픈 달구 아버지의 얼굴을 자꾸 기웃거리면서 그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작은 것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어요. 작은 것들은 정말 상대하기가 어려워요. 무슨 수를 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렇게 말한 달구 아버지의 말은 모두 맞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정말 솔직한 고백을 토로했다는 것을. 그는 보기 드물게 큰 체구를 가진 씨름선수였지만, 작은 선수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선수이다. 자신보다 작은 선수들에게 늘 패한 나머지 조롱을 받으며 모래판을 떠난 사람이다. 그는, 그의 고백처럼 작은 것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달구 아버지가 씨름 성적이 형편없었던 것은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이다.
비둘기처럼 작고 영악하고 잔망스러운 것들은 하지만 이길 생각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자기 잇속을 차리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래야만 상대를 제압하고 살아남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의 대개의 속성이 그렇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은 그것을 뻔뻔하게 드러내놓고 해낸다. 그들은 작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약한 척하면서 안 그런 척하면서 탐욕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들은 작고 민첩한 자신들의 조건을 이용해 눈앞의 이익을 그악스럽게 좇는다. 쥐새끼도 그렇고 아프리카에 산다는 하이에나도 그렇다. 모든 작고 사악한 것들이 다 그렇다. 흰개미도 그렇고 사마귀도 그렇고 박테리아도 그렇고 세균도 그렇다. 그들은 영악한 꾀를 부려서 큰 것들을 농락하고 허물어뜨린다. 작다는 것은 더 이상 불리한 게 아니다. 그들은 작기 때문에 유리하다. 작은 것들이 큰 것보다는 약하고 선할 것이라는 자연계의 편견을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 이용한다. 그것들을 폭력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큰 것들을 쓰러뜨리는 도구로 이용한다. 오히려 큰 것들은 속수무책이다. 키가 큰 것들, 몸집이 큰 것들은 오로지 크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적인 견제와 적대감을 고수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몸집이 유달리 큰 사람은 몸집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늦은 밤거리의 골목길에서 보행자에게 잠재적인 강도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몸집이 큰 선수와 몸집이 작은 선수가 격투기 같은 시합을 벌이면 일방적으로 몸집이 작은 선수를 응원한다.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맞으면 통쾌해한다. 톰과 제리라는 유명한 만화영화가 있다. 이 만화가 오랜 세월 인기를 끌었던 것은 톰이라는 몸집이 큰 고양이가 제리라는 몸집이 작은 고양이한테 항상 당하는 것을 사람들이 통쾌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톰이 악당이라고 볼 수가 없다. 오히려 톰은 온갖 잔꾀를 부리는 제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다. 제리는 아주 탐욕스럽고 잔인해서, 자신이 당한 것을 꼭 열 배 스무 배로 되갚는다. 아프리카 물소는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은 밤에 하이에나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다. 하이에나가 발라먹고 남은 무소의 내장은 개미와 박테리아들이 샅샅이 먹어치운다. 살해의 종적은 오직 태양 아래에서 말라붙고 있는 물소의 흰 뼈뿐이다. 작은 것들의 폭력은 이렇게 금방 지워지고 말소된다. 작은 흰개미 떼가 잠자리의 날개를 갉아먹고 잠자리의 큰 눈마저 먹어치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승자로서의 포즈조차 취할 필요가 없다. 그들로선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고도로 조작된 자연계의 편견이 자신들의 탐욕과 폭력을 언제까지나 용인하고 그들의 죄를 사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