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 씨를 보고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머릿속에는 아직도 옥희 씨 생각뿐이다. 내게 손수 사이다를 따라주던 그 하얀 손목. 그것은 지켜져야 하는 순수의 상징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새봄의 풀잎이고 7월의 나뭇가지이며 얼음이 풀리고 처음 물의 길을 내는 2월의 물줄기이다. 생각이 여기에서 그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끈끈하고 칙칙한 끄나풀 같은 것이 내 생각을 잡아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 만세가 그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가 계속 불길한 그림자처럼 내 기억 속 한켠에서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 옥희 씨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일까. 머리를 흔들고 눈을 질끈 감으면서 떨쳐버리려고 해도 쉽사리 그리되질 않는다.
저물녘이 되자 아래층이 시끄러워진다. 궁금해서 내려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아래층 약방에 모여 있다. 자전거상회 심씨 아저씨, 철물점 송씨 아저씨, 미술학원 오씨 아저씨, 그리고 꽃집의 김씨 아주머니 등이 하루 동안의 피로를 고스란히 드러낸 노곤한 얼굴들을 하고 서 있다. 아, 달구 아버지도 있다. 그가 동네 어른들과 어울리는 걸 본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가 전화를 돌리더니, 간만에 ‘비둘기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이 열리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조촐하게 수제비를 끓여내셨다. 사람들이 약방 뒷방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제비를 먹는다. 반찬은 포기김치 하나뿐이지만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저녁이라 그런지 아주 풍성해 보인다. 나도 인사를 하며 그 틈에 끼어든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러자 동네어른들도 반갑게 나를 맞아준다.
“상문이구나. 어서 와라.”
“그래 법은 다시 공부 안 할 거니?”
우리 집안과 내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고 있지만, 내가 법과에 다니다가 공부를 그만두고 휴학한 것을 여전히 안타까워하는 자전거상회의 심씨 아저씨가 넌지시 묻는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한다.
“그게, 별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아니 머리도 좋은 애가 그럼 뭘 공부하려고.”
자전거 상회 심씨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자 철물점 송씨 아저씨가 대뜸 말을 받는다.
“상문이는 시인이잖아. 시를 쓴다고. 시가 뭔지나 알아?”
“아 나도 알지. 내가 뭐 바본 줄 아나.”
철물점 송씨 아저씨와 자전거 상회 심씨 아저씨가 그렇게 말을 주고받자, 나는 참을 수 없이 머쓱해진다. 시인이라는 게, 생활 속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고 비현실적인 이름이던가. 그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시가 얼마나 불합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내가 잠시 붉어진 얼굴로 나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침묵을 깨고 다시 송씨 아저씨가 한마디 한다.
“내가 아는 건 딱 하나야. 시는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거.”
그 말이 더욱더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난감하게 한다. 뭐라고 옹색한 대답이라도 하고 싶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아버지가 동네어른들을 향해 한 말씀을 하신다. 오늘 모임의 좌장 자격으로.
“저기, 수제비들 마저 들면서 내가 하는 말 잘 들으라고. 지금 우리 동네는 자네들도 알다시피 망조가 들었어. 아주 단단히 망조가 들었지. 비둘기 떼들이 하늘을 뒤덮고 똥을 싸지르고 있잖아.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를 그 요망한 비둘기들이 아예 점령을 해버렸지. 사람들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비둘기 똥을 맞아서 옷을 갈아입는 건 다반사고, 집 지붕이나 창틀에도 온통 비둘기 똥 천지야. 이렇게 비둘기들이 동네 환경을 더럽히면서 주민들의 인심도 바뀌었어. 우리 동네는 원래 이렇지 않았지. 깨끗하고 조용하고 또 인심이 참 좋은 곳이었어. 큰소리 한번 안 나던 곳이었지. 그런데 비둘기가 이 동네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다 바뀌었지. 내가 오늘 모이자고 한 건, 비둘기들을 우리 동네에서 몰아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서야. 이제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보지는 못하겠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