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의 손에는 담배 한 보루가 들려 있다. 어딜 다녀오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욕심껏 담배를 샀다는 건 알겠다. 개인적인 편견인지 모르지만, 나는 담배를 보루째 사는 사람을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가 욕심이 많고 게으르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호주머니에 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곤 함부로 내 얼굴을 향해 담배연기를 날린다. 여전히 무례하고 불량하다. 도대체 이런 뻔뻔한 악의는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며 무엇을 향하는 것일까.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두려움에 때문에 만들어진 존경심만큼 비겁한 것도 없다고. 나는 이 무뢰배와 다를 바 없는 중학교 동창생에게 버럭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시인의 분노가 이렇게 사소해서야 되겠는가는 둘째 문제다.
“야 조만세. 내가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는데? 넌 아직도 내가 중학생인 줄 아는 거냐?”
내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제법 알심 있게 나가자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음흉하기 짝이 없는 그의 셈속을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세상 참 좁다. 넌 요즘 뭐하냐? 대학 안 갔어? 너 공부 꽤 잘했잖아.”
역시, 그는 금방 표정과 말투를 바꾼다. 그 영악스러움이 정말 역겹기 짝이 없다. 대답하고 싶지 않지만, 대화를 끝내야 만세와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싱겁게 대답을 하기로 한다.
“지금 휴학 중이야. 과가 적성이 맞지 않아서 휴학했어.”
“그렇군. 난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나 이 동네 살아. 저기 비둘기식당에.”
그가 손을 들어 내가 지나온 길 뒤편을 가리킨다. 그의 손끝은 정확히 비둘기식당의 간판을 향하고 있다.
“알고 있어. 네 얘긴 준교한테서 들었어. 네 어머니가 저 집 아저씨랑 재혼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 집이랑 우리 집은 예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야. 거기 아저씨도 잘 알고.”
“그랬군. 준교 새끼도 이 동네에 사는가 보네. 걘 정말 내 밥이었는데.”
졸렬하고 유치하며 천박하다는 면에서 만세의 말투는 내가 그를 알던 중학생 때와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예전에는 그런 야만의 포즈가 자신의 누추한 지위를 감추는 데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남자들이라면 죄 알다시피 중학교에 다닐 무렵의 남자애들의 세계란, 누가 먼저 어른의 비정함과 몰염치를 그럴 듯하게 흉내 내느냐에 따라서 물리적인 지위와 서열이 결정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런 기만과 협잡이 먹혀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또 하나의 형편없는 천격이 아닌가.
“넌 뭐할 생각이냐?”
나는 여전히 그에게 강경한 말투로 묻는다.
“난 취직해야지. 지금 우리 엄마가 일자릴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아마 타이어공장에서 일하게 될 것 같아.”
아, 그렇구나. 타이어공장이 우리 동네에 들어선 이후, 이 동네 주민들이라면 누구라도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길 원했다. 일자리 구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에서 사실 큰 기업체의 생산공장만큼 안정적인 직장도 드물 것이다. 실제로 타이어공장은 동네에 주소를 가지고 있는 원주민들을 우선적으로 특별 채용해서 일없이 놀던 많은 동네 사람들이 지금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실이 개입해서 심심찮게 잡음이 일곤 했다. 타이어공장의 인사를 총괄하는 자가 뒤로 촌지나 뇌물 따위를 받으면서 그 액수에 따라 누구는 채용을 하고 누구는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인사 총괄 책임자는 우리 동네 출신이고 전직 경찰관으로 경사출신인데 오토바이 상회 계씨 형제들과는 먼 사돈뻘이 되는 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장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그 자에게 줄을 대기 위해 오토바이 상회 계씨 형제를 자주 찾아가곤 했다. 아마도, 만세가 공장에 들어가게 된다면 정상적인 채용 절차를 거치는 게 아니라 그 역시 그런 식으로 알음알음 청탁을 통해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만세가 담배 끝의 불똥을 손가락으로 툭툭 털면서 껄렁하게 말한다.
“언제 술이나 한잔하자. 그런데 너 술은 할 줄 아냐. 암튼 술 마시고 싶으면 아무 때나 우리 집에 와라. 술도 많고 안줏거리도 많아. 내가 공짜로 줄게. 그리고 옥희라고 일하는 여자애가 하나 있는데, 아주 끝내준다.”
그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 하나를 펴서 세운다. 그건 양아치들이 여자를 가리킬 때 쓰는 천박한 시그널이다. 아, 만세의 입에서 옥희라는 이름이 나오다니. 그리고 그녀를 새끼손가락으로 가리키다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것처럼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입 안이 쓰다. 하지만 아직 내색을 할 수는 없다. 내 사랑은 조용한 진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나는 대꾸를 하는 대신, 얼른 만세와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볼 날이 있겠지 뭐. 잘 가.”
그러자 만세가 사나운 매처럼 휙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