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 씨가 그 목소리에 들리어 황급하게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뒷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안쓰럽고 서럽다. 감상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옥희 씨의 하얀 손목을 잡고 비둘기 떼의 가로막과 비둘기 떼의 똥 장애물을 피해 멀리멀리 아무도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 부르릉거리는 오토바이와 검은 석유의 찌꺼기로 삶아진 타이어 떼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비둘기식당에 저녁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 때가 되어서 어차피 달구도 바빠질 것이다. 옥희 씨를 보았다는 것,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는 것, 그리고 나에 대한 그녀의 선의를 확인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가슴이 기분 좋은 흥분감으로 가득 차올라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심호흡이라도 하고 싶다.
“달구야 나 이제 그만 갈게.”
“형, 왜 벌써 가려구요.”
“사실 가슴이 너무 벅차서 더 있고 싶어도 못 있겠어.”
달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를 닮아 큰 체구의 달구가 오늘따라 더욱 믿음직스럽다.
비둘기식당을 나와서 20미터쯤이나 걸었을까.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날렵한 체구의 어떤 남자가 난데없이 아는 체를 한다.
“상문이네. 너 상문이 맞지?”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 누군가 했더니, 그는 만세다. 달구 새엄마의 아들 만세. 중학교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조만세. 그는 내 아버지의 직업이 한의사라는 걸 알고는 내가 돈깨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돈을 요구해서 내가 그것에 응하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만들면서 학교 안에서나 학교 밖에서 공갈과 협박과 폭력을 일삼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너무나 분하고 이가 갈려서 저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다. 그런데, 참으로 우습게도 그의 어머니가 달구 아버지와 결혼을 하면서 그는 이제 달구의 형이 되었다.
“아, 만세구나.”
“말투가 하나도 안 반가운 말투네.”
그는 여전히 시비조다. 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는다. 꿀릴 이유도 없다. 더 이상 그의 일당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중학생이 아닌 것이다.
“생각해봐, 반가울 리가 없잖아.”
“어쭈. 얘 말하는 것 좀 봐.”
“너 제대했다는 말은 들었어.”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만세는 지금처럼 체구가 적었지만 잔머리를 쓰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리를 만들고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 민첩했다. 키가 크고 몸이 좋은 애들하고만 어울리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가 어울리던 아이들은 주로 유도나 농구를 하던 운동부 애들이었다. 그는 그런 아이들의 힘을 방패 삼아 급우들에게 온갖 폭력을 휘둘렀다. 어쩌다가 일대일로 맞붙게 되는 경우를 닥치면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서 상대편을 공격했다. 만세가 하던 짓을 보다 못해, 병구라는 애가 학교 밖으로 만세를 불러내서 맞짱을 뜬 적이 있었다. 사실 일대일로 싸우면 만세는 병구의 상대가 안 되었다. 병구는 투포환을 하는 육상선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구는 그날 만세로부터 반은 병신이 될 때까지 얻어맞았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만세는 아무도 몰래 미리 호주머니에 넣어왔던 숯가루를 병구의 안면을 향해 뿌린 것이다. 병구가 눈을 부비는 사이에 만세는 어느새 가방에서 이소룡이 자신의 영화에서 멋지게 사용했던 쌍절곤을 꺼내서는 병구의 머리를 깨버렸다.
병구는 일주일을 꼬박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그것으로 만세가 받은 처벌은 보름 동안의 정학이 전부였다. 자교 학생들 간에 일어난 폭력이 밖으로 새나가는 걸 꺼려한 교장선생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사건을 서둘러서 덮어버린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만세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는 그런 사실에 한껏 기고만장해졌지만 사실 아이들은 이제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그를 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