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옥희 씨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소금을 뿌려도 결코 흐려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무구한 눈동자. 그녀는 그제야 자기 이름을 부른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것 같다. 나는 옥희 씨를 향해 앞으로 달려가 장바구니를 낚아챈다. 도대체 이런 행동은 누가 나에게 알려주고 누가 시킨 것인가.
돌연 내게 장바구니를 빼앗긴 옥희 씨가,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더니 주방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나를 향해 잠깐이나마 엷은 미소를 지은 것을. 그것은 짧고 희박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간절한 미소일 수밖에 없다. 나는 식당의 홀 중앙에서 지구 끝자락에 서 있는 듯한 아득함을 느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에 기꺼이 사로잡힌 것이다. 그 미소에 귀가 먹고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지 카운터에 앉아 있는 달구 아버지는 잠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무심하게 TV 화면 쪽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 달구 아버지는 이제 차라리 하나의 정물 같다. 정물처럼 굳어가는 존재.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달구가 내 옆에 와서 서 있다. 그가 나를 보고 웃는다. 내 마음을 죄 알겠다는 표정이다.
“형 그거 이리 주세요.”
“응 뭐?”
나는 정말이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여전히 머릿속이 멍하다. 내 머릿속에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달구는 무얼 달라는 거지?
“장바구니요.”
“아아, 장바구니. 그래 여깄다.”
내 손에 들려 있는지도 몰랐던 장바구니를 달구에게 건네자, 달구가 그것을 주방 쪽으로 밀어 넣어준다. 그것을 주방 안쪽에서 누군가가 받는다. 그때 다시 살짝 하얀 손목이, 옥희 씨의 것이 틀림없을 하얀 손목이 보인다. 달구와 나는 다시 구석 테이블로 돌아와 앉는다.
“형, 제 생각이긴 하지만요. 옥희 누나도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정말 네가 보기에도 그러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지금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그때 주방문이 열리고 다시 옥희 씨가 홀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보니 평소와는 달리, 뒷머리 칼을 머리끈으로 묶은 것을 알겠다. 아까는 그런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냉장고 쪽으로 가더니, 사이다 한 병을 꺼내서 마개를 따고는 유리컵과 함께 우리 쪽으로 가지고 온다. 그리고 내 앞에 유리컵을 내려놓더니 사이다를 따라준다.
“이것 좀 드세요.”
그러면서 달구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살짝 책망하듯 말한다.
“우리 집에 온 손님한테 여태 아무것도 안 드리고 뭐 했니. 물이라도 드렸어야지.”
그러자 달구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그리고 한편으론 무언가에 크게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깜빡했지 뭐예요.”
“하하하.”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내게서도 웃음이 나온다. 옥희 씨가 따라준 사이다를 마신다. 그것이 마치 견딜 수 없는 기갈 즈음에나 마시는 생명수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사이다를 마시는 동안 옥희 씨는 그 자리에 서서 내 모습을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컵을 다 비우자, 다시 병을 기울여 남은 사이다를 마저 따라준다.
“고마워요. 옥희 씨.”
내가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그녀가 내게 이렇게 인사한다.
“앞으로 자주 놀러 오세요. 상문 씨.”
아, 옥희 씨가 나더러 자주 오라고 한다. 자신을 보러, 자주 오라고 한다. 내 사랑이 나더러 자기에게 오라고 하는 것이다.
“옥희야, 거기서 뭐해!
주방 쪽에서 옥희 씨를 찾는 앙칼지고 날렵한 달구 새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