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사랑은 이처럼 그 주변과 둘레까지도 환하게, 이토록 설레게 하는 것이로구나. 그것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수줍은 빛깔로 물들이는 것이구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시인의 편지를 옥희 누나에게 전하고 아래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설 때 제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나 자신의 것이 아니고 간접적인 체험이긴 하지만, 사랑이 내 가까이에 와서 나를 살짝 건드리고 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화장실에 가서 얼굴과 발을 씻고 방에 와서 누웠지만 오늘은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문이 형이 편지에 뭐라고 썼을지, 그리고 상문이 형의 편지를 읽고 옥희 누나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하느라 머릿속이 너무나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네, 차차 알 수 있겠지요. 시인이 편지 속에 어떤 사랑의 노래를 담았을지, 그리고 그것이 옥희 누나에게 어떤 빛깔로 전해졌을지. 그들의 표정만 살펴보아도 금방 알게 되겠지요.
오늘은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씨 할아버지의, 희망 없는 시절을 견디는 독특한 취미와 호호 할머니의 쉽게 끝나지 않을 뜨개질, 그리고 상문이 형의 마음속에 피어난 사랑까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세상의 아름다운 비밀을 엿보았다는 감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는 사이, 눅지근하고 푸근한 잠기운이 밀려오는 걸 느낍니다.
다시 아침이 밝았습니다. 여느 때처럼 옥희 누나가 식당 주방의 철제문을 여는 소리에 잠이 깹니다. 새엄마는 간밤에 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얼굴이 푸석한 채로 식당 홀로 나옵니다. 주방에서 해장국 솥이 걸린 1번 버너에 불을 넣은 옥희 누나가 홀로 나와서 식당 문을 엽니다. 홀의 의자에 앉아 한껏 방만한 자세로 기지개를 켜던 새엄마가 주방으로 들어갑니다. 식당 문을 열기가 무섭게 목욕탕 주씨 아저씨가 식당 안으로 들어섭니다. 오늘은 웬일로 혼자입니다.
그는 구석진 테이블에 자릴 잡고서는 늘 먹는 해장국을 시킵니다. 옥희 누나가 그에게 물컵과 깍두기 종지를 가져다줍니다. 간밤의 편지 생각에 옥희 누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지만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게 없는 표정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편지를 읽기는 읽은 것인지 공연한 조바심까지 일어나네요. 주씨 아저씨가 옥희 누나에게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말을 건넵니다.
“만숙씨, 아니 주인아주머니 지금 주방 안에 있지? 내가 급하게 좀 보잔다고 그래.”
옥희 누나가 새엄마에게 주씨 아저씨의 전갈을 전합니다.
새엄마는 여전히 간밤의 숙취가 풀리지 않았는지,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주방에서 나와 주씨 아저씨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갑니다.
“주 사장님 일찍도 오셨네요.”
그렇게 건성으로 새엄마가 인사를 하자, 기분이 좀 언짢았는지 주씨 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만숙씨, 어제 계씨 형이랑 어디 간 거예요? 내가 노래방에서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두 사람이 사라졌던데.”
“가길 어딜 가요, 그냥 집에 왔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계씨랑 만숙씨랑 호프집에 들어가는 걸 안마방 손씨가 봤다던데.”
“에이 잘못 봤겠죠. 저 정말로 집으로 왔어요.”
“계속 거짓말할 거예요? 내가 만숙씨를 얼마나 찾았는데, 핸드폰을 해도 통 받질 않고.”
주씨 아저씨는 새엄마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입술이 일그러지면서 그의 얼굴이 온통 새빨개집니다. 주방에서 해장국을 쟁반에 담아 내오던 옥희 누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간에 서 있기만 합니다. 새엄마가 갑자기 목소리에 콧소리를 잔뜩 담아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을 하네요.
“아니, 오늘 주 사장님 왜 그래요? 사장님 말씀대로 제가 계씨랑 술 한 잔 더 했다고 쳐요.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주 사장님 아침부터 저한테 시비 걸러 오신 거예요, 저는 주 사장님이랑 더 있고 싶었는데, 계씨가 나가자고 해서 나갔을 뿐인데.”
“정말이에요? 계씨가 나가자고 한 게?”
“아유, 그럼요 주 사장님.”
그렇게 말하면서 새엄마는 주씨 아저씨의 팔을 끌면서 자리에 앉힙니다. 그러곤 옥희 누나를 향해 손짓을 합니다.
“옥희야 얼른 해장국 가져와. 그리고 소주도 한 병 가지고 오렴.”
옥희 누나가 해장국과 소주를 테이블 위에 가져오자, 다시 새엄마가 주씨 아저씨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주 사장님, 제가 술 한 잔 드릴게요. 어제 일은 잊어버리세요. 어제 다 같이 술에 취했었잖아요. 제가 주 사장님을 얼마나 생각하는데.”
그때 아침 일찍 채소를 띠러 시장에 나갔던 아버지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러자 새엄마가 주씨 아저씨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의자를 살짝 뺍니다. 아버지는 홀 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의식했는지, 어정쩡한 표정으로 홀 안을 둘러봅니다. 어젯밤, 내 기억이 맞다면 엄마는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간 시간이 여덟 시쯤이었으니, 새엄마는 노래방에 가서 박씨 아저씨 주씨 아저씨 등과 놀다가 주씨 아저씨의 주장대로 오토바이 상회 계씨 형과 따로 밖에 나가 술을 더 마신 게 분명합니다. 주씨 아저씨의 태도로 봐선 그것 말고도 계씨 형과 새엄마 사이에 또 다른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분명히 새엄마가 계씨 형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쫙 달라붙는 가죽바지를 입은 계씨 형의 허벅지를 아무도 몰래 새엄마가 쓰다듬지는 않았을 겁니다.
“참, 우리 만세는 아직 안 일어났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새엄마는 짐짓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허튼소리를 하더니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주씨 아저씨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새엄마의 엉덩이를 바라봅니다. 아버지는 심기가 불편한지 카운터 의자에 앉으면서 아침 신문을 손등으로 한번 툭 털면서 신경질적으로 펼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