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내가 말했잖아. 더 이상은 숨길 수가 없어서 너에게 말하는 거라고. 진실은 숨길 수가 없는 거야. 사랑은 기침과 가난과 함께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 중 하나지. 내가 옥희씨를 좋아하는 게 네가 보기엔 이상하니?”
“아니요, 그게 아니고, 너무 뜻밖이어서 놀랐어요. 언제부터 옥희 누나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
형은 여전히, 양 볼에 다소 홍조를 띠고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녀가 이 세계에 존재한 순간부터였지. 내가 아직 그녀를 알지 못했을 때조차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어.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존재를 미리 예비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지. 너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란다. 어떤 존재를 느끼는 건 감각만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거든.”
상문이 형 말대로 나는 형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어떻게 상대방을 알지 못할 때부터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건 어쩐지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게도 나는 상문이 형의 말이 조금도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적으로 명백하게 증명되는 사실들, 예를 들면 얼음은 차갑다는 말보다도 더욱더 확고한 진실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상문이 형이 건네준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아 쥡니다. 마치 그것이 너무 꽉 오므리면 질식해서 죽고야 말 어린 새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식당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끝났는지 아저씨들은 모두 안 보이고 테이블에는 술에 완전히 취한 만세 형이 혼자 엎드려 있습니다. 옥희 누나 혼자서 테이블에 함부로 널려 있는 냄비 그릇과 술잔과 술병들을 치우고 있습니다. 나는 옥희 누나를 보고는 상문이 형이 건네준 편지를 얼른 뒷주머니에 감춥니다.
“누나 아빠랑 새엄마는 어디 가셨어?”
“어, 달구 왔구나. 아저씨는 30분 전쯤에 말도 없이 나가셨어. 아마 남산공원에 가신 것 같아. 그리고 아주머니는 아저씨들이랑 같이 나가셨는데, 아마 노래방에 가신다는 것 같았어.”
누나 말대로 아버지가 남산공원에 가셨다면 아저씨들과 새엄마가 술 먹으며 떠드는 걸 보고는 심사가 어지간히 뒤틀린 것이 분명합니다. 남산공원은 심사가 불편하거나 새엄마한테 화가 났을 때 아버지가 찾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달이 비춰주는 동네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건강하고 모범적인 취미도 없고, 심지어는 편견도 없으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관리할 능력 또한 없습니다. 새엄마는 아저씨들과 한잔 더 하러 노래방에 갔다는군요. 네, 새엄마라면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지금쯤이면 계씨 형의 노래에 맞춰 그의 허리춤을 잡고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달구야. 좀 도와줄래. 우선 만세 씨를 방으로 좀 옮겨야겠는데.”
착한 옥희 누나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응 그래, 걱정하지 마. 만세 형은 내가 방으로 옮길게.”
나는 나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만세 형은 일으켜서 등에 업힙니다. 체구가 적고 마른 체형이긴 해도, 이미 술에 흠뻑 취한 만세 형의 몸은 젖은 솜 더미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만세 형의 입에서는 연신 침이 흘러나옵니다. 그 침이 내 뒷목을 적십니다. 술을 마신 건지, 아니면 술로 샤워를 한 것인지, 몸 여기저기에선 술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나는 만세 형을 업고 이층 계단을 한칸 한칸 올라 겨우 그의 방문 앞에 당도합니다. 내가 등에서 흘러내리는 만세 형의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사이, 뒤를 따라온 옥희 누나가 서둘러서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폅니다. 나는 만세 형을, 이제부터 한집에 살게 된, 내가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을 이부자리 위에 눕힙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