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시대, 희망과 등을 진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는 고육지책. 아, 윤씨 할아버지의 옛날 신문읽기가 그런 사연을 가진 기벽이라는 걸 알고 나니, 갑자기 상문이 형의 손을 잡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무언가 깨끗하고 투명한 눈물을 흘려야지만, 윤씨 할아버지와 호호 할머니, 그리고 상문이 형의 삶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호의를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형, 희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요?”
“글쎄, 나도 지금 그걸 찾고 있어. 나는 시인이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그 희망의 어렴풋한 전조나 기미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정말 네 말대로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점점 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매달리듯 상문이 형에게 묻습니다.
“형, 그러지 말고, 형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줘요. 희망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음, 좀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랑과 화해 속에 희망이 들어 있지 않을까. 경쟁하지 않는 절제와 먼저 욕망하지 않는 겸손, 그리고 희생과 양보.”
나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랑과 화해, 절제와 겸손과 희생, 그리고 양보. 너무나도 자주 많이 들어온 말들입니다. 조금도 낯설지 않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요. 왜 좋은 것들인데도 이루어지는 건 어려울까요. 원래 좋은 일은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내 머릿속엔 어디에서건 먹이가 있는 곳이면 떼를 지어 게걸스러운 식탐을 드러내는 살진 비둘기 떼들과,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시뻘건 고깃국물을 떠먹고 침을 튀기며 큰 목소리로 떠들던 박씨와 주씨 손씨 아저씨의 모습과 요란한 배기통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를 모는 우스꽝스러운 계씨 형제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식탁 밑으로 계씨 형의 허벅지를 연신 쓰다듬던 몇 시간 전의 새엄마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들은 아마도 희망을 아주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겠죠. 그들은 이미 사랑과 화해, 절제와 겸손과 희생 따위가 없어도 충분히 자기들 앞에 놓인 삶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내가 잠시 나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집을 들춰보고 있던 상문이 형이 시집을 덮으며 말을 합니다.
“달구야, 네가 마침 여기에 온 김에 내가 너에게 할 얘기가 좀 있어. 네가 오늘 여기 오지 않았어도 조만간 널 찾아갈 생각이었어.”
그렇게 말하는 상문이 형의 표정이 꽤 진지합니다. 그리고 약간 상기된 것처럼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습니다.
“형 무슨 얘긴데요.”
형은 대답 대신, 책상 위 책꽂이에 꽂혀 있는 두꺼운 공책을 하나 꺼냅니다. 그리고 그 공책을 열어 그 갈피에 끼어 있던 봉투를 하나 끄집어냅니다. 색깔이 아주 곱고 예쁜 편지봉투입니다.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는 내 마음을 나는 지금 너에게 이야기하려고 해. 일단 이걸 받으렴.”
그러면서 상문이 형은 편지봉투를 내 손에 건넵니다.
“형, 이게 뭐예요?”
“그 안에 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있어. 달구야. 그걸 옥희 씨에게 전해주렴. 옥희 씨에게 주려고 쓴 편지가 그 봉투 안에 들어 있거든.”
“옥희 누나요?”
“그래 옥희 씨… 사실은 나 옥희 씨를 좋아한다. 그녀를 사랑해.”
“네? 정말요?”
상문이 형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뜻밖이라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슴까지 쿵쾅쿵쾅 뛰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가슴이 이다지도 뛰는 걸까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말, 어떤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 그것이 진실한 마음에 온전히 가닿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라 노래나 시가 아닐까요. 저는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노래와 시를 들어서 지금 내 가슴은 이렇게 뛰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