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한의원은 식당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저기 저 앞에 수정한의원의 낡은 간판이 보입니다. 그 간판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집니다. 수정한의원의 정문에는 한의원 간판 바로 밑에 윤씨 할아버지가 직접 써서 붙인 또 하나의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비둘기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 본부.”
네, 그렇습니다. 윤씨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비둘기를 쫓아내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의 실질적인 회원은 고작 윤씨 할아버지와 그의 부인인 호호 할머니, 그리고 그의 아들 상문이 형뿐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심 비둘기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도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비둘기 추방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비둘기들을 이 동네에서 추방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동네를 거의 완벽하게 지배해버린 비둘기 떼의 위세에 질려 속수무책인 거지요. 이런 사정 때문에 ‘비둘기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둘기는 시방 매우 강하고 힘이 센 ‘현실’입니다.
비둘기는 이 동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이 동네에서 소위 말하는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긴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소유가 정확히 일치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행복의 조건을 자신들의 일방적인 논리로 완벽하게 무장시킨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좀처럼 회의하는 법이 없으며 자신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이의 형편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합니다. 우연한 일인지 아니면 어떤 교묘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동네에서 주류에 속한다는 사람들은 비둘기들이 이 동네를 지배한 뒤부터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들입니다. 가게가 커지고 수입이 늘었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목욕탕 주씨 아저씨와 세탁소 박씨 아저씨, 안마당 손씨 아저씨입니다.
윤씨 할아버지가 직접 써서 붙인 ‘비둘기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 본부’가 내 눈에 슬픈 외국어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수정한의원의, 칠이 거의 다 벗겨진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윤씨 할아버지가 약방 조제실 바깥쪽에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네요. 그리고 윤씨 할아버지의 부인인 ‘호호 할머니’는 좀 더 안쪽 구석에서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예의 뜨개질을 하고 있습니다. 호호 할머니 언제나 변함없이 방긋방긋 웃으시는 할머니에게 내가 만들어 붙인 별명입니다.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할머니는 내가 볼 때마다 언제나 뜨개질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단 한번도 뜨개질 바늘을 손에서 놓은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할머니는 무얼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뜨는 걸까요.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합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저 달구예요.”
“아, 달구 왔구나. 오랜만에 왔네.”
“달구야 안녕!”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니, 비둘기에게 당한 모욕 때문에 풀이 죽어 있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할아버지는 입가에 웃음기가 떠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럼, 기분이 좋구 말구. 오늘 김대중 씨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났거든. 이것 좀 보렴.”
그러면서 윤씨 할아버지는 저에게 당신이 보고 있던 신문을 내밉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할아버지가 저에게 보라고 내민 신문은 1979년 12월 날짜가 찍힌, 활자가 세로로 인쇄된 아주 오래된 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