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다시 상문이 형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남겨두고 나는 아무도 몰래 식당을 빠져나옵니다. 아버지는 YTN에서 흘러나오는 별다를 것도 없는 뉴스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뉴스는 희망과 절망을 배합 비율도 지키지 않으면서 마구 버무려내는 소문의 반죽기 같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걸 알면서도 어디에 가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침묵과 적막을 생각하면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옵니다. 아, 나의 아버지.
내가 식당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비둘기 한 마리가 내 머리 위에 똥을 싸지르고 달아납니다.
“에잇, 저 망할놈의 비둘기.”
뿜어져 나오는 역정을 숨기지 않은 나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휴지를 꺼내 비둘기 똥을 닦아냅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상문이 형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래 상문이 형을 만나러 가야지. 그래서 웃음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물어봐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정한의원을 향해 발길을 내딛습니다. 비둘기들은 군데군데 모여, 아이들이 무심코 던져놓은 과자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습니다. 그때 불현듯 통쾌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비둘기를 발로 차보자.’ 한번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억울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나는 조심조심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비둘기들은 과자부스러기를 쪼는 데 정신이 팔려서 내가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세발자국, 두 발자국, 한 발자국. 마침내 비둘기들의 주의를 속이면서 나는 그들의 부리 앞까지 다가갑니다. 나는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던 날렵한 발로 비둘기 한 마리를 뻥 차보려고 합니다. 비둘기를 발로 차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제야 실천에 옮기려는 겁니다. 이 망할놈의 비둘기를 발로 차서 지옥까지 날려버릴 거야. 비둘기 떼, 더 이상 좋은 것의 상징이 될 수 없는, 욕심 많고 게으르고 더러운 날짐승. 내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하고 이 동네를 똥과 고깃국물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게 만든 기분 나쁜 날짐승. 비둘기가 우리 동네에 나타나고부터 정말이지 좋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빠졌습니다.
유독 살진, 그래서 몹시 둔해 보이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내 발 어귀에서 과자부스러기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 바로 이 녀석이야. 뭘 얼마나 처먹었기에 이토록 살이 쪘니. 나는 그 녀석에게 발부리를 겨눕니다. 이 녀석은 하늘을 나는 연습을 게을리 한 게 틀림없어. 나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리고 축구경기에서 강력한 슛을 날릴 때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 발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힘껏 내지릅니다.
아, 그런데, 발끝에 아무런 감촉이 없습니다. 비둘기가 내 발끝에 닿을 때의 감촉이 어떨지 내심 궁금했었는데, 발끝은 아무런 감촉 없이 허전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알 수 없게도 몸이 휘영청 하는가 싶더니, 눈앞에 난데없이 길바닥이 일어섭니다. 나는 중심을 잃고 쓰러집니다. 아, 약삭빠른 비둘기는 내가 발을 내지르는 사이 살짝 몸을 피했던 것이고, 그 바람에 헛발질을 한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진 겁니다. 축구를 하면서 단 한번도 헛발질을 한 적이 없는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중에서 날아오는 공도 척척 발만 갖다대면 멋진 슛이 되곤 했는데, 이 결정적인 순간에 살진 비둘기 한 마리를 제대로 차버리지 못하다니.
부끄럽고 창피한 나는 바닥에 넘어지면서 부딪친 팔꿈치가 아픈 것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는지 주위를 살핍니다. 저 앞에서, 안마방에서 일하는 아가씨 하나가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인지 젖은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걸어오고 있네요. 한쪽 손에 비누와 샴푸가 든 바구니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 맞는가 봅니다. 그 아가씨가 나를 지나치면서 풋, 하고 웃습니다. 내가 비둘기를 발로 차려다가 헛발질을 하고 바닥에 고꾸라진 것을 다 본 모양입니다. 그 아가씨에게서 진한 비누 냄새가 납니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아득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요. 나는 되도록이면 빨리 걸어서 이 냄새를 쫓아버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