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 누나가 만세 형에게 건넨 말은 내가 마지못해 건넸던 말과 똑같습니다. 나와 옥희 누나를 살짝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함께 설핏 웃었던가요.
그런데, 갑자기 옥희 누나의 눈빛이 무언가에 질린 듯 아득해집니다. 만세 형이, 옥희 누나를 향해 소리를 친 것은 그것과 거의 동시입니다.
“젠장,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 말을 해. 난 네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만세 형은 자기 때문에 정들었던 방까지 내어준 옥희 누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심술을 내보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옥희 누나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합니다. 가늘고 엷은 팔에 소름이 돋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교활한 야생동물, 이를테면 스라소니 같은 것과 딱 마주친 사람처럼 가엾게도 잔뜩 겁에 질린 것 같습니다. 새엄마의 노골적인 냉대와 무시도 의연하고 담담하게 견뎌냈던 것을 생각하면 옥희 누나의 겁에 질린 모습은 의외입니다. 정말이지, 누구에게나 자신을 공포감으로 사로잡히게 하는 천적 같은 존재가 있긴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옥희 누나에게 만세 형이 그런 존재일까요?
그런데, 식당 문이 열리면서 세탁소 박씨 아저씨와 목욕탕 주씨 아저씨와 계씨 형제가 성큼 식당 안으로 들어섭니다.
“아이고, 만세가 제대해서 왔다면서요. 그래서 얼굴 좀 보려고 왔지.”
“그럼 만숙씨 큰아들이 제대를 했다고 하는데 축하를 해주려고 왔지”
박씨 아저씨와 주씨 아저씨는 예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를 던지면서 자신들이 나타났음을 알립니다.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 격앙된 말투, 호들갑스러운 목소리, 산만하고 거친 걸음걸이. 박씨 아저씨와 주씨 아저씨, 계씨 형제들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할 때 써먹는 특유의 습속들입니다. 저는 그 습속이 참으로 우습고 가소롭게 느껴집니다만, 그들은 그럴 때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위세가 죄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이고, 고맙기도 하셔라. 내 아들 제대한 걸 또 어떻게 아셔가지곤. 그럼 여기들 앉으세요. 내가 빨리 술상을 볼게요. 내 아들 녀석에게 좋은 얘기 좀 많이 들려주세요. 이제 이 녀석도 사회에 나가야 하는데, 사장님들이 도와주시면 좀 좋아요.”
새엄마는 박씨 아저씨, 주씨 아저씨, 그리고 계시 형제들의 허리춤을 하나하나 잡으면서 만세 형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죄 앉힙니다.
“안녕들 하세요. 저 조만세라고 합니다.”
만세 형은 그들에게 붙임성 있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합니다. 같은 어른이지만 아버지를 대할 때의 뻣뻣하고 당돌한 모습과는 퍽 대조적입니다.
“아이구 녀석, 넉살도 좋게 생겼네.”
“그러게 아주 영리하고 눈치도 빠르게 생겼어.”
“아항, 만숙씨 전부군이 조 씨였구만. 조만세라 좋은 이름이야.”
박씨, 주씨, 계씨 아저씨들이 그렇게 변죽을 울리면서 술자리가 시작됩니다. 새엄마와 옥희 누나는 국물이 있는 탕류와 찌개를 계속 술자리에 올리고, 다른 테이블까지 가져다 붙여서는 갈비까지 굽습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뒷전(카운터)로 빠져서 그들의 술자리를 무른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때 주씨 아저씨가 마침 옆 테이블에 갈비살을 뒤집으러 왔던 새엄마의 손을 잡아끌면서 질퍽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만숙씨도 이리 와서 앉아요. 같이 한잔 합시다.”
그러자 새엄마는 교태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 마다하지 않는 기색으로 주씨 아저씨 옆에 껴 앉습니다. 이미, 박씨, 주씨, 계씨 형제 둘에 만세 형 다섯 명이 둘러앉아서 좁은 형국인지라, 새엄마는 거의 주씨 아저씨 무릎에 앉은 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