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마침내 그 사고가 일어났어요. 엄마의 교통사고 말이에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엄마는 사고가 있던 날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서 열무 단을 사가지고 오던 길이었어요.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원하게 열무김치를 담아서 손님들 상에 올리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어떤 운명의 심술이었는지 엄마의 자전거 앞에 수십 마리의 시커먼 비둘기 떼들이 길을 가로막고는 간밤에 취객이 쏟아놓은 토사물을 쪼아 먹고 있었어요. 엄마는 그 비둘기 떼를 피하려다가 난폭한 오토바이에 치이셨던 거예요.
말하자면 엄마는 우리 동네에 갑자기 몰려든 비둘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죠.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비둘기가 우리 동네에 몰려들지 않았다면 엄마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엄마가 그토록 어이없는 사고를 당해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마치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슬피 울었어요. 어처구니없게도 저보다도 더욱 서럽게 우시더군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비둘기들은 여전히 이 동네를 자기들의 왕국인양 점령하고는 마음껏 똥을 싸지르고 다녔어요. 심지어는 어머니의 영구차 지붕에도 마구 똥을 싸질렀죠. 나는 그때 이놈의 비둘기 떼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버리고 싶다는 무서운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면, 뒤뚱뒤뚱 닭처럼 땅바닥에서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쪼아 먹는 비둘기를 단 한번만이라도 축구화를 신은 발로 힘껏 차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상상을 했죠. 축구공처럼 멀리 뻥 차버리고 싶다는 생각요.
아버지는 장례를 치르고 49재를 지내고 1주기가 지날 때까지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는 마치 말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어요. 사람들은 아빠를 동정하고 이해했죠. 친절하고 손맛 좋은 안주인을 잃은 토담집은 더 이상 장사를 할 수가 없었죠. 토담집에서 밥을 사먹던 사람들이 오히려 밥과 국을 챙겨 와가지고는 아버지와 저에게 권하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그냥 멍하니 텅빈 식당의 홀에 앉아서 담배를 피며 밖을 내다보는 게 아버지의 일이었어요. 아버지는 신문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죠.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어요. 나는 엄마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나태와 무기력에 대해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빨리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그리고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운동에 매진했어요.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사실 축구에 전념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엄마를 잃은 저 자신의 슬픔을 잊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죠.
엄마가 만들어주던 간식과 도시락은 고맙게도 옥희 누나가 맡아서 해주었어요. 저는 그렇게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어요. 제가 중요한 시합에 나가 골을 넣고 승리에 수훈을 세워도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으셨죠. 제가 그날 시합에서 얼마나 잘 뛰었는지 설명을 해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는 했어요. 저는 그것이 속상했어요. 그때 우리 집의 중심이 되어줬던 게 옥희 누나였어요.
옥희 누나는 어머니의 빈자리의 티가 너무 크게 나지 않도록 집안일을 꼼꼼하게 단속했어요.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누나가 처음 한 일은 집안 곳곳에 쌓여 있던 빨래거리들을 찾아서 빨래를 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깨끗한 밥상을 차려서 웃음을 잃은 아버지와 내 앞에 내놓았죠. 그리고 언제나,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아버지와 저에게 늘 밝은 목소리와 웃음을 보여주었어요. 특히 어느 날의 밥상머리에서 누나가 한 말은 아버지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죠. 저는 누나가 참으로 지혜가 많은 사람이란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