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가 전공한 것은 그 시절의 수재들에게 인기 있었던 법학이나 의대가 아니고 영문학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집안사람들은 물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의 출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그가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가 되어 돌아와서는 못 되어도 최소한 교수는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군대에 갔다가 그만 사람이 이상해져서는 제대했다고 하더군요. 이전의 그 똑똑하고 방정하던 사람이 매우 소극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했어요. 아예 몇날 며칠을 한마디도 하지 않거나, 어쩌다 입을 열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죄 헛소리이고, 사람들에게 역정을 잘 내는 등, 도통 사람 노릇을 하지 않으려 든다는 거였어요. 들리는 말로는, 아, 그건 너무 흉측한 소문이어서 입에 담기가 좀 그런데요. 그가 군대에서 선임병들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군대에서 정신이 이상해져서 제대한 후부터 그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직장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해요. 그의 재능을 아낀 선배의 소개로 결혼을 하긴 했지만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하루 종일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거나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올려보는 일이었다고 했어요. 어쩌다가 밖에 나가면 혼자서 한강에 나가 술을 마시는 게 일이었다고 해요. 그의 유일한 수입원은 번역을 하는 것과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고는 하는데, 그마저 신통치는 않았나 봐요. 옥희 누나의 아버지가 가졌던 남다른 성정 중에 가장 괴팍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옥희 누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이었대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고, 학교는 타락의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며, 학교는 진실의 하수구라는 둥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면서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끝끝내 거부했다더군요. 그러고는 딸아이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가르치겠다고 나섰다지 뭐예요. 그래서 옥희 누나는 학교라곤 교문 앞조차 가본 적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타고난 천재였던 아버지로부터 과연 배운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제가 실제로 겪은 옥희 누나는 매우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었어요. 사리분별도 명확했고 예의도 발랐지요. 다만, 보통 사람보다 말수가 적고 겁이 많은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옥희 누나는 나보다 다섯 살이 위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하던 토담집에 들어오던 당시 옥희 누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저는 열세 살이었죠. 저는 조금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저에게 예쁜 누나가 생긴 것이 마냥 기쁘기만 했어요. 옥희 누나 역시, 처음엔 좀 어색해하는 듯했지만 저에게 참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고, 엄마 일도 열심히 도우면서 우리 집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나갔죠.
돌이켜보면 그해의 몇 개월, 그러니까 옥희 누나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한 가족처럼 생활하던 그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몇 개월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한창 축구의 재미에 빠져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가는 시합마다 거의 매 경기 골을 넣으면서 중학교 축구팀 감독님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어요.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잘 웃지 않는 옥희 누나도 방긋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곤 했죠. 아빠는 식당을 꾸려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시합이 열리는 곳이면 그곳이 아무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라도 달려와서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해주시곤 했어요.
식당은 작고 소박했지만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 정갈한 음식맛과 엄마의 따뜻한 정성과 친절함 때문에 많은 손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지금은 발길을 끊은 수정한의원 원장님이신 윤씨 할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지 시인인 상문이 형, 철물점 송씨 아저씨와 자전거 상회 심씨 아저씨, 미술학원 오씨 아저씨 등이 매일같이 와서 밥을 먹고는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