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운동부에서 운동을 한 친구들이라면 다들 이해하겠지만, 교실보다는 운동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책보다는 축구공과 함께 했던 시간이 훨씬 많았던 저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감성보다는 육체적인 감각을 요구하는 생활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어른들이 하는 말들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운동을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학교 교육을 받은 아이들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사실 다치기 전 저는 착하고 건강한 학생이었을 뿐이지, 똑똑하거나 섬세한 학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뇌수술을 받은 이후 마치 머리 한쪽의 스위치가 켜지듯, 제가 몰랐던 말과 언어들이 내 머릿속에 박혀오기 시작한 거예요. 비유를 하자면 허공에 박혀 있던 수없이 많은 신기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내 눈을 찌르고 내 입술에 부딪쳐 왔던 거예요. 저는 하루에도 수백 개가 넘는,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 단어들을 중얼거려야 했어요. 그건 몹시 두렵고 경이로운 경험이었죠. 그러면서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말과 언어를 모르는 세계는 굳어 있는 세계일 뿐이라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 역시 굳어 있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이 있고, 말이 돌고 돌아야, 시간이 돌고, 그래야 생명도 도는 것이라고. 운동이 전부인 줄 알았던, 그래서 몸의 감각과 근육만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지배하려고 했던 제가 말을 통해, 세상의 숨소리를 듣게 된 것이죠.
저는 제가 새로운 말, 그때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눈부신 비늘을 가진 새로운 언어들을 접하던 그 첫날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병원에서 퇴원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어요. 동네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은 그렇게 건강하고 늠름하게 운동장을 달리던 제가 파리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면서 돌아오자 다들 동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어요. “아니, 상어처럼 그렇게 멀쩡하고 건강하던 애가 이게 뭐니 이게!” 그렇게 말하면서 제 팔에 매달리며 눈물을 쥐어짜는 친척아주머니도 계셨고 들릴 듯 말 듯 “아, 달구가 이제 바보가 되었구나. 새파랗게 젊은 것이 앞으로 어떻게 살란가.”라며 탄식을 하는 학교 선생님도 계셨죠. 하지만 저는 그들과는 달리 그렇게 비통하거나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내 머릿속은 어떤 때보다도 맑았고, 영하고 성한 기운 같은 것이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싱그럽게 내 콧구멍을 통해 가슴속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주 맑았던 어느 날 오후, 홀로 식당 앞에 내어놓은 의자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 문득 머릿속으로 백만 마리의 나비 떼처럼 신기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이 나풀거리며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건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저는 평화로웠고, 그 모든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마음이 되었어요. 저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단어를 하나라도 놓칠 새라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중얼거렸어요. 그러니까 내 머릿속으로 ‘상심’이라는 단어가 들어올 때 입술로 상심이라고 중얼거렸고, 내 머릿속으로 ‘공존’이라는 단어가 들어올 때 내 입술은 공존이라고 중얼거렸던 거예요. 그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입술로 중얼거려야만 그 말이 나의 말, 나의 생각이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거죠. 아 지금도 생각하면 놀라워요. 아는 거라곤 축구밖에 없던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단어 하나가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내 입술이 그것을 중얼거리는 시간은 0.1초도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자그마치 머릿속으로 백만 마리의 나비 떼, 아니 백만 개의 단어가 나풀거리면서 들어오고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