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가 토담집, 아니 ‘비둘기네 해장국’의 새로운 단골들과 이런 시답잖은 소리들을 늘어놓으면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건 형식만 말일 뿐, 내용은 도저히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에요. 아빠 역시 저랑 비슷한 심사인지, 박씨 아저씨와 주씨 아저씨가 우리 식당에 밥을 먹으러 오면, 그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YTN에 맞춰져 있는 텔레비전의 볼륨을 키우고 화면에만 눈길을 주지요.
사실 박씨 아저씨와 주씨 아저씨는 아빠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고 짓궂게 굴어요. 그들의 어떤 자신감이 그들로 하여금 아빠를 그토록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빠에 대한 그들의 무례함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예요. 혹시 아빠가 키도 작고 빼빼 마르고 말수도 적어서 저렇게 무시를 하는 것일까요?
어제 오후에도 박씨 아저씨와 주씨 아저씨는 게걸스럽게 해장국 투가리를 비우고 계산을 치르면서 아빠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듣고 보니,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을 말이었어요.
“공씨, 이 친구야, 밤일에 신경 좀 쓰면서 살아. 만숙씨 좀 봐. 발정이 난 것처럼 늘 달떠 있잖아.”
그러자 그만 아빠의 얼굴은 무참하도록 빨개지고 말았어요. 박씨 아저씨는 바로 옆에 있던 나를 보고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쯧쯧 혀를 차고는 주씨 아저씨와 낄낄대며 식당을 빠져나갔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어요.
세상에는 이해해야 할 말이 있고 감상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해해야 할 말은 그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따져야 하는 말이고, 감상해야 할 말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따져 물어야 하는 말이죠. 박씨 아저씨가, 나의 아빠에게 함부로 무례하게 지분거린 말, 그들은 내가 자기들이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옆에 있든 없든 그런 말을 지껄였겠지만, 나는 그 말을 전부 다 알아들었죠. 그들이 말한 ‘밤일’이라든가, ‘발정’이라는 말이, 얼마나 감상할 가치가 없는 말인지,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러운 말인지 분명히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감상할 가치가 있는 말의 옹호자로서, 감상할 가치가 있는 말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사람으로서, 박씨 아저씨와 주씨 아저씨를 마음속으로 경멸하기로 했어요. 그들이 아무리 단골손님으로 우리 식당의 매상을 올려줘도 나는 그들을 조금도 좋아할 수 없었어요.
음, 네 지금이 좋겠군요. 제가 여러분께 언제쯤 털어놓으면 좋을지 고심하고 있던 저만의 비밀이 있었거든요. 네, 이제 그 비밀을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틀림없이 믿지 않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그 분들을 원망하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저에게 일어난 일은 사실 저조차도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의 대부분, 그러니까 새엄마는 물론이고 아빠와 동네 사람들은 제가 축구경기를 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친 이후 바보가 되었다고 자기들 멋대로 단정 짓고,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믿는 것 같았어요. 네, 큰 수술을 받고, 오랜 시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으니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잘못 아는 거랍니다. 저는 지금 제 귀에 들려오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말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어요. 오히려 머리를 다치기 이전보다 세상의 말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됐죠. 그건 제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어요. 사실 저는 말이나 언어에 대해서 그렇게 뛰어난 감수성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