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새엄마는 다른 동네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아빠와 재혼을 하면서부터 우리 식당으로 살림을 갖고 들어왔고(식당 주방의 뒷문을 열고 나가면 살림을 할 수 있도록 방이 세 칸 딸린 구옥이 나옵니다. 엄마와 아빠와 나는 그곳에서 살았죠), 우리 식당 옆자리에 있던 미용실과 비디오가게 자리까지 세를 내어 식당의 홀을 확장하고는 ‘비둘기네 해장국’으로 식당의 간판을 바꿔달았던 거예요. 토담집이었던 시절, 다시 말해 나의 엄마가 소박하게 시래기국과 북어국을 끓여서 손님들을 맞던 시절의 우리 식당은 테이블이 여덟 개에 자리가 서른두 개뿐인 아담한 규모였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해 어느 날 저는 엄마에게 이렇게 투정을 부렸던 적이 있어요. 아마도 그날 저는 학교에서 갈비집을 크게 하던 같은 반 친구에게 자존심을 상하는 일을 당했던 것 같아요.
“엄마 우리도 식당을 좀 크게 하면 안 돼? 돈도 많이 벌고, 폼도 나잖아.”
그러자 엄마는 입술로만 살짝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그러곤 이렇게 말했죠.
“우리의 땅과 하늘은 우리들에게 딱 그만큼만 먹으라고 나물과 채소를 주시는 거란다. 그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 욕심이야.”
엄마는 제법 어려운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신기하게도 그때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분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었어요. 아무튼 토담집은 동네 어르신들이 장에 다녀오시다가 잠시 다리를 쉬게 하려고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면 엄마가 재빠르게 미숫가루나 냉커피를 타서 드리곤 하는, 그래서 누구나가 마음 편하게 앉았다 갈 수 있는 그런 쉼터 같은 곳이었죠.
새엄마가 식당의 규모를 늘린 뒤 세어보니 테이블은 스물다섯 개로 늘었고 자리는 백 개로 늘어나 있었어요. 다시 말하자면 한꺼번에 백 명의 손님이 들어찰 수 있는 커다란 식당이 돼버렸던 거예요. 저는 그때만 해도 오로지 축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식당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어요. 다만, 새엄마가 통이 크고 장사에 소질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나는 축구만 열심히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조금씩조금씩 식당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쓴침을 삼키는 것처럼 씁쓸한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괴기 시작하더군요. 식당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음, 무엇보다 손님들이 바뀐 것이라고 해야겠군요. 엄마가 식당을 하던 때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밥을 먹으러 오던 단골손님들이 서서히 발길을 끊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예 출입을 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철물점 송씨 아저씨도, 자전거 상회 심씨 아저씨도, 그리고 시인 상문이 형도, 한의원의 윤 할아버지도 더 이상 밥을 먹으로 오질 않았어요. 제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우리 식당은 뜨겁고 붉은 고기국물을 마시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토담집의 단골들 자리를 전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던 사람들이 새로운 단골이 되어 그들의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죠.
특히 세탁소 주인 박씨 아저씨와 목욕탕 사장 주씨 아저씨는 우리 집의 단골 중 단골이에요. 그들은 사람들이 몰리는 점심 시간을 피해서 오후 서너 시쯤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서는 에어컨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해장국을 시켜서 맥주를 마시곤 하지요. 그러면 새엄마가 주방에서 거의 달리듯 뛰쳐나와서는 이들을 요란스럽게 맞고는 해요. 그건 웬만한 비위가 아니고서는 두 눈으로 못 봐줄 풍경이죠.
“아유, 박 사장님이랑 주 사장님 오셨어요? 날씨 참 덥죠? 두 분 오늘 따라 참 허해 보여요. 비둘기안마방에 신참년들이 왔다더니, 너무 무리들 한 거 아녜요? 아무리 영계가 좋다지만.”
“하하하, 이것 참 면구스럽게, 속 좀 확 풀리는 걸로 좀 줘봐요.”
“맞아, 이 집 국물을 하루라도 안 먹으면 속에 덩어리가 뭉쳐 있는 것처럼 이상하단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