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의식이 없었다고는 해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나를 두고 새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나는 많이 섭섭했어요. 하지만 새엄마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죠. 새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저는 병원에서 석 달 정도 더 치료를 받은 후에 퇴원을 했어요. 그런데 후유증이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귀가 자꾸 울리고 어지러워서 잠시도 정신이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휘청거리기 일쑤였죠. 맞아요. 저는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거예요.
퇴원하기 며칠 전, 병원을 찾아오셨던 감독선생님이 제 손을 잡고 깊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저는 그것을 직감했어요. 아, 이제 축구를 더 이상 할 수 없구나. 감독선생님은 저의 재능을 가장 아끼시는 분이었어요. 평소에 저를 보고 “축구선수로서의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고 하실 정도로 제 실력을 인정해주는 분이었죠. 훈련 때도 가장 혹독하게 저를 다그치고 나무라셨죠. 저는 선생님께 물었어요.
“저 이제 축구 못합니까?”
그러자 선생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군요.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축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더 이상 축구를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었어요.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을까가 사실 더 큰 문제였죠. 촉망받는 고등학교 축구선수였던 제가 하루아침에 사람노릇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마저 염려스러운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었어요. 물론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비록 몸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그리고 학교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 테지만 꼭 졸업은 하고 싶었거든요. 주변에서 저를 걱정해주신 많은 분들도 저에게 학교만은 꼭 마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사람은 많고 땅덩어리는 좁아터진 나라에서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않고서는 어디에서건 사람 구실 하기가 힘들 거라고 얘기들을 하셨죠. 제가 틀림없이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송씨 아저씨도 눈물을 쥐어짜시면서 그렇게 말했고, 엄마의 형제들, 그러니까 이모나 외삼촌도 다들 그렇게 말했고, 제가 운동하던 시절 가끔 보약을 지어먹던 영생한의원의 원장 아저씨도 그랬고, 삼포자전거상회의 심씨 아저씨도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꼭 마쳐야 된다구요. 학교에서도 사실 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제가 학교를 마치는 것을 돕겠다는 생각이었대요. 학교를 위해 뛰던 시합에서 다쳤기 때문에 그 정도의 배려는 할 생각이었겠죠.
그런데 저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죠. 퇴원을 하고 며칠 후에 새엄마가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이랑 교감 선생님을 만나고 오더니, 저는 바로 그 다음다음 날 자퇴처리가 되었어요. 나는 새엄마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았지만, 아빠는 황급히 제 눈길을 피하시더군요. 우리 아빠, 네, 우리 아빠는 언제나 새엄마가 하자는 대로만 하는 사람이에요. 왜, 우리 아빠는 무슨 일이건 새엄마가 하자는 대로만 하는지 저는 알 수가 없어요. 그건 두 분 사이의 일이니까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우리 아빠는 저에게 착하고 좋은 분이라는 거예요. 비록 새엄마에게 꼼짝 못하고 붙잡혀 살지만 말이에요.
아, 저와 제 가족을 소개하는 저의 이야기가 좀 장황해지고 있네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연을 두고 그냥 건너뛸 수가 없어서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는 거니까, 이해해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