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에필로그- 바람농장의 아이들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희영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모니터의 푸른 빛 속에 희영이 잠시 눈을 감았다.
맨 마지막에 검색해본 ‘문서정보’는 원고지 매수 1,320매를 표시하고 있었다. 세상에! 자신이 1,000매가 넘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던 걸까. 희영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희미하게 손바닥에 전해지는 심장 박동. 언제부터인가 희영이 자기 가슴에 손바닥을 댈 때면 따뜻한 촛불 심지가 함께 두근거렸다. 불꽃…온기… 연결되어 있다… 심장과 손바닥처럼, 우리 모두는.
희영이 눈을 떴다. 촉촉해진 눈가가 반짝였다. 클릭!
다이어리를 펼쳤다. 2009년 6월 21일 오늘은 일요일. 작년 6월 21일은 토요일이었다. 일년이 지났는데 고작 토요일에서 일요일이 된 거야. 맘에 들어. 희영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작년 오늘 지오가 그 애의 레인보우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대통령은 그 뒤로도 변하지 않았다. 사과한지 열흘도 안되어 국민이 제안한 끝장토론을 거부하더니 ‘촛불집회 더 강력히 대응하겠다’며 색소를 탄 물대포가 등장했고 시청 광장은 원천봉쇄 되었다. 도로에서만이 아니라 인도에서도 시민들이 연행되고 데이트 하러 명동에 나간 커플들이 무차별 검문 연행되기도 했다. 정부는 자동인형처럼 되뇌었다. ‘법대로 진압 하겠다’고. 여전히 정부는 토론 대신 연설을 원했다.
작년 6월 25일. 시민 139명이 연행되고 100여명이 부상당한 날이었다. 진압이 시작되면서 난장판이 된 현장에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단발머리 소녀가 머리채를 잡힌 채 연행되고 있었다. “뭐야, 저기!” 연행되는 소녀를 본 누군가 찢어질듯 가느다란 고음으로 소리쳤고 그 순간 십여 명의 여자들이 경찰을 향해 떼로 달려들었다. 그날, 여자들이 경찰을 때렸다! 소녀를 연행하는 진압 경찰 두 명의 팔과 다리에 순식간에 여자들이 들러붙었다. 누군가는 경찰의 손등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진압복으로 무장한 경찰의 가슴팍과 어깨를 두 주먹을 꼭 쥔 채 온힘을 다해 내리쳤다. 투구를 쓰지 않았다면 경찰의 귀라도 깨물었을 판이었다. 삽시간에 몰려들어 물고 뜯는 여자들로 어안이 벙벙해진 두 명의 진압경찰로부터 단발머리 소녀가 풀려난 순간이었다. 누군가 두 팔을 벌려 소녀를 안았고 소녀가 여자들의 품에서 그제야 안도의 울음을 터뜨렸다. 진압하는 자와 진압당하는 자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던 현장이 삽시간에 역전되었다. 죄를 지었으니 연행한다는 듯 기세당당하던 경찰이 쪼그라들어 말했다.
“아주머니들. 이렇게 불법행위 하시면 안 되죠. 법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닌데……”
연행하려던 ‘죄인’을 빼앗기고 변명거리를 찾는 노새처럼 경찰이 우물거리는 순간이었다.
“지랄! 이 판국에 법이 뭐라고 우릴 통치해.”
“그리고 엇다대고 아줌마래? 내가 아주머니로 보이니 넌?”
몰려들었던 여자들이 떼로 와글거렸다.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 울먹이는 소녀를 데리고 십여 명의 여자들이 벗어든 하이힐과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건널목을 건너간 뒤 B병원 응급실에 희영은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언니 손목 인대가 다 늘어나? 그 경찰 진짜 아팠겠네”
손목에 간이 깁스를 한 희영을 보며 연우가 말했다.
“희영언니 그렇게 과격한 거 첨 봤어. 완전 야수 같았다니깐!”
원피스 자락을 뜯겼다고 투덜거리면서 수아가 킥킥 거렸다.
“놀리지 마. 나도 놀랐어.”
희영의 말에 깁스를 마무리하던 간호사가 풋, 웃었다. 그 웃음을 신호로 치료실의 여자애들이 한꺼번에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7월까지 시민들의 촛불은 계속 되었다. 거리에 떨어진 시민들의 손목시계와 안경과 신발짝들을 낙엽을 쓸 듯 청소부들이 걷어갔다. 정부의 강경진압을 보다 못한 종교계의 촛불이 6월 30일 천주교 시국미사를 필두로 7월 3일 개신교 시국기도회, 7월 4일 불교 시국법회, 7월 5일 범종교계 주최의 촛불집회로 이어져 50만 명의 촛불이 다시금 광장에 모여들었지만 촛불은 서서히 흩어지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100일을 넘게 모였다.
연우는 다리의 깁스를 풀고 병동 복도를 혼자서 걸어보았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무릎관절을 다시 쓰기 시작하자 새로운 일이 기다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2008년을 달구었던 촛불의 여름을 서둘러 묻어버리고 싶은 온갖 비방과 비판이 넘쳤지만 연우는 낙천적이었다. 애초부터 촛불은 좌도 우도 아니었으니 좌로부터의 섣부른 비판도 우로부터의 살벌한 비방도 상관할 바 아니었다. 촛불들은 그저 행복한 삶을 원하고 정직한 정치를 원한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마음의 발로였을 뿐이니까.
결국 촛불이 얻은 게 뭐냐고 병실에서 삼십대 여자가 냉소했다. 왜 얻은 게 없어요? 국민을 표밭으로만 알던 오만한 대통령이 두 번이나 사과했잖아요. 여자가 눈을 반짝였다. 추가협상 해서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들여오기로 했잖아요. 미약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촛불을 들지 않았다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변화죠. 촛불을 두려워한 정부가 수도와 전기, 의료의 민영화 추진을 중지하겠다고 했고 대운하 추진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촛불로 항거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은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의 방관 속에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입맛대로 그저 흘러갔을 것이었다. 전 이게 미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험한 건 그냥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경험은 언젠가 새로운 경험을 불러올 거예요. 지금 뭐라 단정할 수 없지만 아주 근사한! 아주 따뜻한!
지오에게선 가끔 노트지에 쓴 편지가 민기나, 연우, 희영 등 누군가에게 날아왔다. 이지훈 기자는 여전히 박각시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작년의 촛불 이후 희영은 ‘정치인의 정치’와 ‘나의 정치’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우리 삶의 자유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알겠어.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선 ‘개인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정치인의 정치’는 정치를 통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의 것이지. 그들에게 정치는 자기 이익을 위한 그들의 직업일 뿐이야.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관리되지 않기 위해선 ‘나의 정치’가 필요해. 개인의 삶을 끊임없이 줄 세우고 관리하는 ‘정치인의 정치’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지키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게 서른 살이 된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야.”
<숙자씨, 안녕!> 전시회에 왔던 사람들과 함께 두 주에 한 번씩 촛불 모임을 시작한 지도 일년이 되어 간다. 희영, 연우, 수아가 중심이 된 모임은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여름동안엔 청계광장에 모였고, 더러 공터가 있는 건물이면 어디든 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촛불을 켜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날이 차가워지면서 서로의 집이나 주민자치센터 혹은 민들레영토 같은 데서도 모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캔들플라워”라고 불렀다.
장난스러울 정도로 낙천적인 캔들플라워 멤버들이 모임을 시작한 이래 딱 한번 단체로 운 적이 있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던 그 날 저녁 누군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모두 울기 시작한 것이다. 단 한마디도 못한 채 울기만 한 날. 희영은 여전히 지난 참여정부가 정말로 진보적이었는지는 잘 판단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노무현이었다면 촛불을 향해 물대포를 쏘거나 촛불에 맞서 컨테이너 벽을 쌓는 짓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 대통령과 대화하고 싶어할 때 청와대 문을 활짝 열어 시민들을 맞이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서민을 입으로만 외치며 이용하려는 정치인이 아니라 서민의 마음을 이해한 정치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날 희영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6월은 더웠다. 대운하를 포기하겠다던 정부는 기어코 포장을 바꾼 4대강 정비를 들고 나섰다. 한번 망가진 산과 강을 되돌리는 일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강을 파헤쳐 죽이고 그걸 녹색이라 포장하는 것이 정말 ‘생태적’ 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들의 무식을 깨우쳐 주기 위해 강제로라도 공부시켜야 하지 않겠나. 누군가 제안했고 그 주부터 캔플들은 청와대 홈피에 <모르면 공부하면 됩니다. 공부해서 변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대통령 특별 과외 교습 레터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특별 과외 교습 레터가 블라인드 처리되기 시작하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저 무식을 깨우쳐주지? 아, 어떻게 저 뻔뻔함을 깨뜨려주지? 캔플들은 지금도 새로운 임무를 기다리고 있다.
작년 여름 희영이 간이 깁스를 풀던 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허기지게 쳐들어 오던 그 날. 희영은 사직서를 썼다. 제출일자는 2009년 6월 22일로 정했다. 그 1년간 열심히 백수 자금을 비축하기로 했다. 퇴근 후엔 매일 2시간씩 노트북 앞에 앉았다. 처음엔 하루에 한 장도 쓰기 힘들었다. 조금씩 늘어 어느 날은 두 장도 쓰고 어느 날은 다섯 장도 쓸 수 있게 되었다.
1,320매. 커서가 깜빡거렸다.
소설이야? 글쎄. 일기야? 글쎄. 그냥… 글이야.
글을 쓴다는 희영에게 연우와 수아가 번갈아가며 밥을 사주며 물을 때마다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냥…, 글을 쓰면서, 정말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캔들플라워’ 모임에서 책을 빌리기도 하고 구립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면서 까뮈, 카프카를 다시 읽고 조세희를 다시 읽고 박경리, 오정희, 황석영을 다시 읽었다. 지난 일 년 간 하루에 3시간 정도 잤던 것 같다. 출근과 야근을 한 번도 빼먹은 적도 없었고, 퇴근 후 2시간 글쓰기를 꼬박꼬박 엄수했다. 그런데도 힘든 줄 몰랐다. ‘캔들플라워’ 모임은 지칠 때마다 신선한 힘이 되어주었다.
내일은 6월 22일. 월요일.
월요일에 출근해서 사직서를 내고 회사 문을 등 뒤에 둔 채 걸어나올 생각을 하니 전율이 일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글쓰기는 할 수 있겠지만 생애 한번쯤 오로지 그것에만 파고드는 시간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동안 통장은 세 개가 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당장 굶어죽을 염려는 없다. 그리고 이제 서른 살이 되었다. 서른 살. 무엇이든 다시 꿈 꿀 수 있는 나이. 사직서를 낸 후 일 년 동안은 작정하고 다음 소설을 써볼 생각이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노트북을 희영이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코끼리, 코알라, 돌고래, 코뿔소, 나무늘보, 기린, 펭귄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리라. 신문에서 오려낸 문학상 스크랩들이 책상 한켠에 다닥다닥 붙었다. 상을 스크랩하는 건 상금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생활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문학상 중엔 뜻밖에도 거액의 상금이 많았다. 희영이 빙긋, 웃었다. 누가 아는가. 거액의 상금이 주어져 엄마 아빠에게 정말로 남아프리카 월드컵 본선 관람 티켓을 쥐어주게 될지. 꿈이라고만 생각한 일이 정말 일어나게 될 수 있는 것. 그것도 꿈꾸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거니까.
코코돌코나기펭 출판사에서 첫 책을 출간해야지. 배가 고프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본 채 희영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난 사랑에 배고픈 자다.
코코돌코나기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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