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밤의 레인보우
새벽이야. 아주 고요해.
마리. 예정한 한 달이 지났어. 도착 5월 17일 15시. 출발 6월 21일 16시. 가지런히 정렬된 전자항공권 발행확인서를 들여다보니까 느낌이 이상해. 지난 한 달이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 시간 속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아주 우연하게 이루어진 무슨 꿈처럼 아득해. 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언니들과 민기, 태연과 함께 브런치를 먹고 나는 공항으로 출발할거야. 토요일이라 모두 함께 공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혼자 공항 리무진을 타고 싶다고 말했어. 혼자 떠나고 싶어. 진심으로. 우리는 이어졌으니까 앞으로 긴 인생 여정 동안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 아쉬워할 건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의 이 느낌을 아주 고요히 가지고 가고 싶어. 한 순간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말야.
레인보우는 벌써 여름 꽃들로 가득하겠지? 마리. 말했듯이, 공항엔 나오진 마. 엄마와 조안이 나오겠다고 우기겠지만 마리가 말려 줘. 한국에서 떠날 때처럼 레인보우까지도 혼자 가고 싶어. 약속해 줘.
한국에서 내가 만난 레인보우를 품고 천천히, 홀로, 캐나다의 레인보우에 도착하고 싶어. 앞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레인보우를 생각하면서, 아무도 없는 곳에 처음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고 싶어. 이해하지, 내 마음? 레인보우 엄마 앞에 완벽하게 혼자서 도착한 후 그곳의 여신들이 늘 그러하듯 왁자지껄하게 파티를 시작하면 돼.
무엇보다 나는 샐비어 술을 좀 마시고 싶고. 맨발로 뒷마당 풀밭을 걷고 싶고. 계곡 오두막 건너 내 삼나무 냄새를 맡고 싶고. 티티의 얼굴이 그새 더 늙은 건 아닌지 궁금하고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도 물어보고 싶어. 그린 타라에게도 감사를 전해야할 것이 많은데 한국에서 좋은 향을 좀 가져가. 계곡을 돌아 내려오는 바람 냄새를 맡고 싶고. 신령한 사슴 코코가 돌아간 곳에 맨발로 다시 서보고 싶고. 딸기 덩굴 밑에서 잠깐 낮잠을 자고 싶고. 아, 그리고 여름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걸 보고 싶어. 날갯짓하는 나비의 고요에 대해 소리 내지 않고 칭찬해주고 싶어.
마리. 이제 이곳에서의 마지막 파티에 대해 말해줄게.
엊그저께. 아현동 언덕배기 숙자씨 집에서 전시회를 가졌어. 숙자씨를 위한 전시회였는데 숙자씨, 보리, 사과는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드니까 이 셋을 위한 전시회라고도 할 수 있어. 나와 민기가 거리 홍보를 맡았고 연우언니와 태연이 사진 전시, 희영언니와 수아언니가 파티음식을 맡았어. 목발을 짚고 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연우언니가 “파티, 파티!”를 외치면서 준비하기 시작한 전시인데 준비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 홍보를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우린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마음을 모았어. 숙자씨와 어울리는 방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포스터를 딱 다섯 장만 만들고 촛불집회에서 많이 본 세울 수 있는 팻말을 네 개 만들어서 지하철 입구에 하나씩 두었어. 팻말엔 <“숙자씨, 안녕!” 촛불사진전을 열어요. 무지개 발자국을 따라오세요> 라고만 썼어. 민기와 내가 만든 거리 홍보물은 이렇게 다섯 장의 포스터와 네 개의 팻말, 모두 아홉 개가 전부야. 우린 아주 흡족했어. 아홉은 완전수에 근접해있는 숫자지. 근접해있지만 완전수는 아닌 숫자. 채워지고 있거나 비워지고 있는 숫자. 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숫자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하철 역 팻말과 포스터를 붙인 장소를 연결하면서 언덕배기집에 오르는 길을 따라 수성 물감으로 ‘무지개 공’을 그렸어. 빨주노초파남보라색으로 숙자씨, 보리, 사과의 발자국을 나타내는 조그만 열 개의 발자국을 지름 20센티미터 정도의 원 안에 그려 넣었어. 멀리서 보면 무지개 빛깔의 둥근 동그라미가 길 위에 그려져 있는 거지.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게 열 개의 발자국이란 걸 알 수 있고 말야. 팻말이나 포스터를 보고 숙자씨 집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길 안내 역할인데 길을 잃어버릴만하면 나타나는 ‘무지개 공’이야. “이 길이 맞나?”하고 의아해질 때쯤 나타날 수 있게 우리가 길 찾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시연해보고 그리고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정말 재밌었어. 무엇보다 민기와 함께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이지 너무 좋았고. ‘무지개 공’은 ‘화살표’가 아니니까 길을 직접 지시하지 않아. 그러니 다만 ‘무지개 공’이 떠있는 곳에서 다른 ‘무지개 공’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어. 그렇게 길이 연결되고, 그렇게 길을 찾게 되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
숙자씨 집으로 올라오는 마지막 언덕길, 여러 개의 골목이 만나는 조그만 공터에는 시인할아버지 고물상에서 얻어온 조그만 나무 걸상 두 개를 마주 놓았어. 하나는 빈 의자고 하나엔 양초를 쌓아두고 성냥을 함께 두었어. 해가 저물면 초 하나에 불을 밝혀 두기로 했지.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는 지 그곳에 간단히 써놓을까 하다가 아무런 팻말도 만들지 않았어. 여기까지 ‘무지개 공’을 따라 찾아온 이들이라면 우리가 꿈꾸는 풍경을 짐작하리라 믿었거든.
음…… 이제 민기에 대해 말할 차례야.
마리도 언젠가 이 아일 보게 될 거야. 내가 레인보우에 초대했거든. 지금은 말고 좀 더 큰 후에. 시간이 우리를 향기로워지게 하는 어느 날, 그 아이와 우리 모두가 레인보우 달 계곡에서 파티를 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거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한국행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었어.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한 것.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 뱃속에서부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누군가가 미칠 듯이 그리웠어. 엄마 뱃속의 따스한 물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만지고 영양분을 나누고 비밀을 얘기하고 세상을 궁금해 하던 그 모든 느낌들이 내 한쪽 마음에 오래 묶여 있었나봐.
갑자기 그 애가 내 인생에서 훌쩍 사라지게 된 이유 자체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 사정이란 건 보나마나 하린과 그 사람, 그러니까, 엄마와 내 생물학적 아버지 둘 사이의 문제일 테니까 내가 궁금해 할 이유가 없어. 아니, 설혹 궁금하더라도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지. 아무튼 결과적으로 나는 엄마와 레인보우에 남고, 그애는 아버지와 한국에 오게 된 걸 테니까.
예전에 <나의 역사>를 쓸 때 하린은 이렇게 얘기해 주었어. 하린이 사랑했던 ‘그’는 세상과 인생에 대해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모두 과거형으로 표현된 말이었지. 배낭여행 중에 우연히 동행하게 된 그와 캐나다 로키 산맥 깊숙한 곳까지 함께 오게 되었을 때 하린과 그가 서로를 사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야. 로키 산중의 인디언 공동체에 짐을 푼 순간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하린에게 운명처럼 들었을 때, 하린이 선택한 운명이 자신의 운명은 아니라고 그가 재빨리 판단했다면 나와 바유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는 엄마를 사랑했고 사랑이 그를 주저앉혔겠지. 그 다음은 뭐 뻔한 얘기지.
민기는 세 살 때 화재 사고를 겪었다고 해. 한국에 돌아온 직후인 것 같은데, 화재를 기점으로 민기는 그 이전의 기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 세 살짜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게 어차피 많진 않겠지만, 일곱 살에 내가 겪은 ‘정전 사고’보다 조금 경미한 일종의 정전 상태를 화재를 통해 겪은 것 같기도 해. 내가 엄마 작업실의 사진에서 본, 나랑 똑같은 엉덩이 반점을 오른쪽에 가진 아이의 반달 점은 그렇게 사라졌어. 불에 덴 상처가 반달을 집어삼켰어. 지금 민기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 레인보우, 우리가 함께 튀기던 물방울, 엄마에 대해서도.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그 아이는 너무 혼란스럽고 힘든 상황에 있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말해줄 거야. 내 첫 키스의 사람, 내 동생이자 오빠인,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뱃속에서 인생을 함께 궁금해 한 내 분신.
어쩌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우리가 함께 한 세 살 때까지 내가 그 애를 훨씬 많이 사랑했는 지도 모르겠어. 그 애는 세 살 때의 화재로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나는 좀 더 많이 견뎠으니까. 그 애의 부재를 인정하고 견뎌 보려고 많이 노력하다가 결국 과부하에 걸린 것이 일곱 살의 ‘정전 사고’인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어. 그 애를 잊어버리는데 그 애와 함께 지냈던 세월만큼이 필요했다는 거. 결국은 기억의 정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과정이 이제 조금쯤 이해가 돼. 모든 상처는 치유되고 싶어한다는 걸 알겠어. 지금 내 기분이 어떠냐면, 내가 더 많이 그 애를 사랑했던 것 같아서 아주 기뻐. 그리고 지금 나는 아주 의연해. 나는 아주 강해졌어. 나 자신도 놀라는 중이야.
참,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키스. 키스를 한 순간 알았어. 내가 왜 그 아이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인지. 고통스러워하는 그 아이를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소리를 질러야 할 만큼 왜 내가 이렇게 아픈지. 키스를 한 순간 또렷이 모든 것이 떠올라 왔어. 내 꿈속에 찾아와 발가벗고 놀던 그 아이가. 그 아이 몸의 구석구석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모든 촉감과 냄새들이. 꿈에서 내가 그 아이와 나누었던 키스의 느낌이 고스란히!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필요 없었어. 화상으로 지워진 반달 점 같은 거 확인해 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어. 그 아이, 바유. 바람의 아이. 내 짝꿍.
음……, 생물학적인 아버지, 그러니까 하린과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 바유의 아버지에 대해선 지금은 그다지 길게 말할 자신이 없어. 다만 나는 좀 슬퍼.
그를 보았어. 언덕 밑 공터에 둔 두 개의 의자 사이에서 망설이는 그가 보였어. 아저씨. 거기 빈 의자에 앉아 봐요. 거기에 앉아 맞은 편 촛불을 바라봐요. 연우언니를 향해 오른손을 치켜 올리던 그, 허리띠로 민기를 때렸다는 그, 민기를 불길 속에서 구했다는 그, 엘리베이터에 타고 최상층까지 올라가고 싶은 그, 직장인으로 돈벌이를 하며 엄마 없이 민기를 키웠을 그, 숙자씨 낡은 장롱에서 노트 한 장을 꺼내는 그, 충혈된 눈으로 컴퓨터 앞에서 기사를 쓰는 그, 경찰과 함께 사람들을 취조하는 그, 한 때 세상에 대해 많은 질문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그가……. 아저씨, 거기 앉아 맞은 편 촛불을 바라봐요. 너무 환하게 사방을 전부 밝히진 않지만 자신을 밝히고 자기 주변을 밝히는, 그런 촛불들이 모이면 아주 밝아지는 세상.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는 떠났어. 하지만 빈 의자에 앉는 건 언제든 가능하니까, 모든 것은 그의 선택이야. 연우언니에게 보낸 내 메시지를 확인한 후 그는 내게 어떤 질문을 제일 먼저 하고 싶었을까. 내가 적어준 레인보우 산의 주소를 그도 알고 있을 테고 한 페이지를 찢어낸 코코가죽 노트가 조안이 만들어 준 것이라 했으니 엄마 이름이 정말 하린이냐고 확인해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혹시 우리 식구들이 그가 떠난 후 정말로 공동소유이자 무소유의 마을을 세웠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을까? 아무튼 마리. 이게 그에 대해 지금 말할 수 있는 전부야. 하린에겐 당분간 아무 말 말아줘. 민기와 그에 대해 모두.
이제 모든 사건이 한 번에 물 위로 드러나 버린 지난 밤의 절정에 대해 말할 차례야. 오, 이런!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해.
8시. 언덕배기 호박 넝쿨 집에 촛불을 켰어. 시인할아버지 고물상에서 토막난 양초들을 모두 가져와 마당 가득 수백 개의 촛불을 켰어. 우리가 처음 이 집을 봤을 때처럼.
숙자씨 집 여기저기에 걸린 사진은 모두 열 점인데 을지로에서 숙자씨를 처음 만나던 바로 그날 연우언니가 찍은 사진들이야. 파일로 모두 챙겨가니까 레인보우에 도착해서 보여줄게. 내가 찍힌 사진도 하나 있어. 서랍장이 있는 마루에 전시된 사진인데, 내가 숙자씨를 안기 직전의 순간이야. 사진으로 보고 나도 놀랐는데, 소가, 울부짖던 누렁소가 숙자씨의 맨발을 보고 있었어. 그 큰 눈망울이, 눈물이 그렁하게 고인 그 큰 눈이.
호박넝쿨 옆에 만들어준 사과의 무덤 곁엔 장롱 속 흑백사진을 꺼내 세워두었어. 사과를 묻고난 후 <사과의 집> 문패를 떼어와 무덤 앞에 놓아주었었는데, 동그란 무덤과 문패, 흑백사진을 모두 담은 사진은 내가 찍은 거야. 숙자씨, 보리, 사과가 모두 함께 있는 그 사진은 크게 확대해서 연우언니가 문 앞에 걸어두었어.
오늘의 파티는 모두 숙자씨 집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기로 했어. 숙자씨가 쓰던 상, 그릇들을 반짝반짝 닦아 준비하고 꽃을 꽂아 장식했어. 수아언니와 희영언니가 촛불광장에서 연우식탁을 차리는 것처럼 50인분은 될 것 같은 샌드위치와 김밥을 준비해서 나타났을 때 연우언니와 태연, 나랑 민기는 모두 할 말을 잃었어. 그런데 희영언니와 수아언니는 이 정도로 모자랄지 모른다며 되레 너스레를 떨었어. 희영언니와 수아언니가 각각 활동하는 인터넷 동호회에 전시회 소식을 알려놓았다고 하더라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 50인분이라니! 우리가 아는 확실한 손님은 시인 할아버지밖에 없는데.
달이 떴어. 아, 보름달이. 달속이 너무 환해서 누구도 거짓 같은 걸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밤이었어. 내 귀에 사그락사그락 무언가 아주 엷게 비벼지는 소리가 들려왔어. 엄마 뱃속에서 나와 바유가 서로의 솜털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아주 보드랍고 환한 소리. 콩닥콩닥 여린 심장이 뛰고있는 것 같은……따뜻한……오, 대문 옆이 환해지고 있었어. 꽃이, 하얗고 보슬보슬한 꽃들이 피고 있는 거야. 박꽃이!
여태 호박 넝쿨인 줄만 알았는데 거기 심겨진 것이 호박만이 아니었던 거야. 박 넝쿨이 함께 자라고 있었던 거야. 호박보다 늦게 꽃이 피는 박꽃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는 거였어. 희디흰, 투명한 흰빛이 박꽃 속으로 비쳐들고 있었어. 흰 오각형 별모양을 닮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게감 없이 가볍고 얇실한 꽃들이 공중에 떠있는 듯, 그렇게 박 넝쿨에 매달려 피고 있었어. 레인보우에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이 뜬 여름밤에 피는 꽃. 박 넝쿨을 찾아 줄기를 만져보니 생긴 건 호박넝쿨과 아주 비슷한데 촉감은 융단처럼 부드러웠어. 너무 부드러워서 깜짝 놀라 무언가 떨어뜨릴 것처럼.
아, 곧이어 거짓말처럼 눈앞이 어른거리기 시작했어. 어디선가 공기의 결이 팔랑, 팔랑, 팔랑거리기 시작하더니 나비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거야. 밤에 웬 나비들이지? 자세히 보니 날개도 작고 빛깔도 좀 칙칙한 못생긴 나비들인데 환한 보름달빛 속에서 희게 팔랑거리며 박 넝쿨을 향해 오고 있는 거였어.
“박각시들임메.”
누군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어. 돌아보니 어느 틈에 시인할아버지가 와 계셨어. 술을 한잔 하고 여전히 복숭아빛 얼굴인 할아버지가 눈주름을 만들며 웃고 계셨어.
“박꽃이 피어야 박각시들이 오지비. 박각시가 와야 박꽃이 열매를 맺지비. 숙자씨가 제일로 좋아하는 꽃이 저 박꽃임메. 기억해 두라. 박꽃이 피면 사랑을 하러 박각시들이 오지비.”
아, 박각시! 숙자씨가 부탁한 박각시들이 달빛을 헤엄치며 팔랑팔랑 날아와 박꽃에 앉았어. 파주 금촌 숙자씨 옛집 지붕위의 박꽃, 갓 태어난 송아지를 안고 좋아하는 숙자씨, 보리야 보리야……보리가 껑충거리고……사과는 박 넝쿨 밑에 잠자고……돌아간 누군가는 박 넝쿨이 되고……박꽃을 피우고……박각시들이 사랑을 하러 모여들고……숙자씨……그러니까……꽃을 피워달란 얘기였어요?……그러니까……씨앗을 심고 가꿔달라는 얘기였어요?……그러니까……박각시가 올 수 있게?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둥글고 환한 흰빛처럼?
“저기 좀 봐!”
희영언니와 수아언니가 동시에 소리쳤어.
언덕 아래, 촛불이, 아니, 촛불들이 걸어오고 있었어. 두 개의 의자가 놓인 공터에 성냥이 켜지고 초가 불을 밝히고 촛불이 어둠속에서 움직여 왔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거 봐. 넉넉하게 준비하기 잘 했지?”
희영언니와 수아언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