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딸기 정원이여 영원히
입원 병동 로비를 나서는 이지훈의 뒷모습을 복도 끝 비상구로 연결된 계단의 조그만 창에 붙어 선 채 바라보는 민기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뒤에 다가가지 못한 채 지오가 민기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지오의 눈빛이 민기를 안고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눈빛만으로.
이지훈의 뒷모습이 병원 정문 가로등 저편으로 사라졌다. 정문 벤치 옆의 벚나무가 가로등 불빛에 창백해 보였다. 벚나무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가로등을 향해 날아오르는 걸 바라보다가 민기가 창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지오가 천천히 다가오자 계단에 주저앉은 민기는 책가방을 밑으로 내려놨다. 민기 옆에 옆구리를 바싹 붙여 앉으며 지오가 속삭였다.
“팔짱 껴도 돼?”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지오가 민기의 오른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민기의 팔을 바싹 당겨 팔짱을 끼고 접힌 팔을 자기 가슴 중앙에 딱 붙였다.
“좋아. 아주.”
지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민기가 그런 지오를 비스듬히 바라본 후 희미하게 웃었다. 지오가 오른쪽 팔로 자기 왼쪽 어깨를 툭툭 쳤다.
“기대!”
지오의 말에 민기가 오른쪽 뺨을 지오의 어깨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아버지가 비록 틀리다 해도 보다 어른스럽고 품위 있게 연우누나를 만나고 갔다면 좋았을 텐데, 정말 그랬다면 좋았을텐데……하고 민기는 속으로 되뇌었다. 한참 후 어색한 침묵 때문인지 갑자기 생각난 듯 민기가 팔을 풀고는 책가방에서 엠피쓰리를 꺼냈다. 지오의 왼쪽 귀와 민기의 오른쪽 귀에 하얀색 이어폰 줄이 이어졌다. 엠피쓰리를 꺼내느라 풀었던 팔짱을 다시 껴달라고 민기가 어정쩡하게 오른쪽 팔을 들어 보였다. 지오가 활짝 웃으며 민기의 팔짱을 꼈다.
“나도 좋아. 이 느낌.”
울다가 막 얼굴을 비빈 것 같은 소년의 얼굴로 민기가 말하며 엠피쓰리 버튼을 눌렀다.
나랑 함께 가지 않을래요? /스트로베리 필즈에/ 모든 건 꿈이에요/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스트로베리 필즈여 영원히
눈을 감고 노래를 읊조리던 지오가 문득 생각했다. 이지훈에게도 들려주고 싶다…nothing is real… nothing to get hung about…이라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사람들이 함부로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른들이 가여워지기도 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막막할까. 어쩌면 이지훈도 막막함이 두려워서 도심 가득 지펴진 불꽃들을 더욱 두렵게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 왔는지도 모른다. 이지훈이 지나칠 때 풍기던 술 냄새를 떠올리며 지오가 민기의 팔을 바싹 당겨 안았다. 시인 할아버지와 우리들, 그리고 백만 개 촛불이 꽃 피었으니 숙자씨는 이제 외롭지 않을 거다. 그런데 이지훈의 옆에는 누가 있는 걸까. 사람들이 권력이라 부르는 게 있겠지만 권력이 사람의 외로움을 치유한 적이 과연 있을까. 꼬리를 세우고 소리도 내지 않고 다니는 고양이처럼, 우리도 어른이 되면 알 수 없는 괴물이 내면에 생겨나고 섬뜩섬뜩 돌아다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처음 해보는 질문들이 두서없이 지오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건 진짜라고 언제나 생각하죠/ 하지만 나조차 허구일지도 몰라요/ 당신을 이해한다고 해도/ 모든 건 나 한 사람의 생각일지도 모르죠/ 결국 나와 당신은 같지 않은 거예요
복잡한 배후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코코가죽 노트에 적었던 몇 마디 문장이 대체 간첩의 어디와 통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건지 생각할수록 미궁이었다. 숙자씨가 하늘로 돌아간 그날, 언덕 위 호박넝쿨 집으로 불어오던 바람…. 흰 국화꽃, 오래된 낡은 서랍장, 흑백사진, 사진 속에서 환하고 수줍게 웃고 있던 숙자씨와 소…. 차디찬 병원 냉동고에 연고 없는 시신으로 얼어붙어 있을 숙자씨를 위해 무어라도 남겨주고 싶어서, 정말이지 실낱같은 연고라도 만들어주고 싶어서, 촛불 밑에서 몇 개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적어 내려간 노트. 조심스럽게 찢어내 네 등분으로 접어 언덕을 내려오기 전 서랍장 사진틀 밑에 끼워둔 그 종이 한 장.
<숙자씨. 잘 견딘 거예요. 삶이라는 임무, 잘 마친 거예요. 돌아가면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우리 모두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시간은 수많은 막다른 골목을 가졌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르니까. 위대한 빛을 따라 나아가세요.> 라고 썼던.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문장들이 지령문서로 읽힐 수 있는 것인지. 기억이 종종 왜곡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따라 돌에 새겨진 문자 하나도 수백 가지로 오독되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무섬증이 일었다. 우리가 이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오해들인 건 아닌지. 같지 않은 나와 당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시간처럼.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뛰어다닌 탓인지 민기에게서 희미한 땀 냄새가 풍겼다. 하교하자마자 지오에게로 왔다가, 코코가죽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를 받아 연우에게 가져다준 다음에, 사과를 묻으러 다시 아현동으로 달려갔다 늦은 시간 촛불집회까지 참석했다 온 민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뿌리를 담근 물로 목욕을 하던 레인보우 계곡에 민기를 밀어 넣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아까 홍씨 할아버지가 했던 신기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막 어두워질 무렵 숙자씨 집 호박넝쿨 아래 희영, 지오, 민기가 만들어준 사과의 무덤은 자그마하고 예뻤다. 사과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내려오는 길에 고물상에 들러 홍씨 할아버지에게 빌려 간 삽을 돌려드릴 때, 할아버지는 여전히 뭔가 채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잘 보냈지비?”
납작한 토막 양초들을 바구니에 담아 옮기며 심상하게 홍씨 할아버지가 말했다. 희영, 지오, 민기가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여 가서 일들 보라. 내 서둘러야 할 일이 있씀둥.”
고물상 후미에 쳐놓은 일자 천막 속에 얼핏 보이는 리어카가 곧 나들이를 하려나 보았다. 홍씨 할아버지가 천막 쪽으로 재게 걸음을 옮기다가 불쑥 한마디했다.
“기런데 너 둘은 남매지간이니?”
지오와 민기의 눈이 둥그레지며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아님둥? 내 착각한 모양임메. 피붙이들 중엔 비슷한 땀내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비. 고만 가보라.”
할아버지의 말에 지오와 민기가 서로의 몸에 코를 가까이 대고 큼큼, 땀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쳤었다.
누군가를 막 묻고 온 사람들치곤 다들 평화로웠던 건, 맺힌 것 없이 기품 있게 사과가 돌아갔다고 느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오는 홍씨 할아버지의 땀내 이야기가 귓가에 맴도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스트로베리 필즈여 영원히… 스트로베리 필즈여 영원히… 어느 틈에 머리를 ‘ㅅ’자로 맞댄 지오와 민기가 노래 가사를 함께 읊조리고 있었다. 너에게서 낯익은 땀 냄새가 나. 너의 심장 소리와 내 심장 소리가 구분되지 않아. 하루 종일 같은 곡을 들어서인지 어쿠스틱,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 소리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들려오더니 팀파니, 귀로, 트럼펫, 첼로는 물론 마라카스 속의 씨앗 흔들리는 소리까지 바로 귓전에서 악기를 흔드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도 모르겠어. 아버지가 밉지 않아. 미워할 수 없어.”
민기가 입을 열었고 민기의 말이 지오, 자신의 말인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 살 때 나 혼자 있던 집에 불이 났대. 아버지가 나를 구하러 집으로 뛰어들었고.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은 아버지의 두 팔과 내 오른쪽 엉덩이와 허벅지에 남아 있어. 나야 보이는 부분이 아니니까 상관없었지만 아버지는 한 여름에도 언제나 긴 셔츠를 입었어. 작년에 둘 다 수술을 해 보기가 나아졌지만 상흔은 있지. 그래도 아버지는 그 상처가 맘에 든대. 나를 구했으니까. 이상해. 언제나 내 허리춤을 아버지가 붙들고 있는 거 같아. 내 말 이해해?”
민기의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키스해도 돼?”
지오가 속삭였다. 대답을 들을 새 없이 지오의 입술이 열리고 민기의 입술에 포개졌다. 첫 키스를 기억해. 죽어서 어느 알지 못하는 모퉁이를 돌아갈 때에도 잊지 못할 키스. 그 애의 몸의 느낌을 낱낱이 기억해. 입술과 혀의 촉감도 새겨둬. 비슷한 냄새를 가진 사람. 내가 말했던가, 정전 사고? 내 의식이 캄캄하게 잠든 이유를 이젠 알 것도 같아. 세 살 때 나는 그 애를 잃었나 봐. 그 애와 함께했던 시간만큼 그 애를 잃은 마음이 아파야 내가 살 수 있었나봐. 분신을 잃은 상처를 치유하려고 나, 안간힘 썼나 봐. 어쩌면. 어쩌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