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푸른 새벽
“연습한 보람 있네.”
침상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휠체어에 옮겨 타며 연우가 중얼거렸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를 받았지만,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목발 짚는 연습을 오후 내내 하던 연우가 두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움직여보며 씩 웃었다. 어느 깊은 구멍 속으로 금방이라도 길게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다.
병실은 조용했다. 병들어서 다들 잠들어 있었다. 수아 없이 혼자가 되니 몸이 둥둥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끝 모를 바닥에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다. 며칠째 병실에서 잔 수아는 몸살 기운이 있었다.
“네가 없어도 어차피 나는 다른 곳에 가지 못해.”
연우가 한참을 잔소리를 한 후에야 간신히 수아를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나 하나로 족해. 다들 빌빌거리면 어쩌라구. 너 좋아하는 거품목욕도 하고 집에서 편하게 한숨 푹 자…. 어머니 나오실 때 거의 되어가지? 준비는 잘 되어가?”
집에 가는 길에 광화문에 잠깐 들렀다며 수아가 연우에게 폰카로 찍은 사진과 함께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연우가 수아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정말 예쁜 촛불 바다. 난 촛불 보고 바로 집으로. 잘 쉴게. 사랑해 곰탱이~> 문자 끝에 야아옹, 고양이 마크가 따라 나왔다 사라진다.
조금 전 지오에게서 새로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연우가 환자복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그리고 휠체어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이고 앉아 한 번 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휠체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건너편 침상의 보조침상에 잠들어있던 70대 할머니가 “에효, 보살님, 나무관셈보살…” 잠꼬대를 하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 것이 보였다.
“제가 한연웁니다.”
팔짱을 낀 이지훈이 붉은 실핏줄이 번진 눈으로 연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더 빨리 오실 줄 알았는데.”
연우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냐?”
입을 꾹 다문 채 연우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박각시가 뭐냐고.”
이지훈의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연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박각시는 모릅니다.”
이지훈의 입술 끝이 일그러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장난하나? 박각시에 대해 제보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 신문사 사회부 기자야. 니들과 시간 개념이 달라.”
“알고 있습니다. 유명하시고 바쁘시다는 것도. 특종 터뜨렸으니 더 바빠지시겠군요. 그런 특종이라면 정부 포상 같은 것도 기대해봄 직한데 뭐, 사내 승진 기회야 말할 것도 없겠죠? 근데, 정치계 진출하고 싶어서 그런 짓 하는 건가요. 이지훈 기자님?”
연우의 말이 빨라지며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점점 강해졌다. 안경 너머 이지훈의 눈동자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런 짓이라니? 너, 경찰 조사 받는 내내 비협조적이었다고 하던데, 대한민국 공안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한번 맛보고 싶은 거냐?”
“전혀요. 이미 충분해요. 그리고,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게 조사에 가장 잘 협조하는 거 아닌가요? 전 누구처럼 없는 일을 꾸며내지는 않아요.”
“보아하니 너, 이상한 시민단체들 오가면서 영화 한답시고 청소년들 선동하고 개뿔도 없으면서 불평만 늘어놓는 루저들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가 보던데, 얼른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다. 니 깜냥도 안 되는 일에 함부로 나대지 마.”
이지훈이 더러운 걸 뱉듯이 말을 뱉었다. 연우의 눈초리가 가늘게 떨리는가 싶었지만 주저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남의 인생에 함부로 빨간 딱지 붙이는 게 이 기자님 본업인가 보죠? 직업병이에요? 아니면 인간성이 원래 그래요? 그리고, 함부로 너, 너, 반말하지 마세요.”
연우가 쏘아붙이는 사이 이지훈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술기운으로 불콰하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며 이지훈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순간적으로 오른손이 추켜올려졌다.
“이런 시건방진 게!”
연우가 이지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지훈이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러나 어이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앞으론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다. 두 번 볼일 없겠지만.”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이지훈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지령문서, 이 기자님이 제공하셨죠?”
순간, 이지훈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뚝 섰다.
“그런데?”
“그 지령문서, 제가 알고 있는 겁니다.”
이지훈의 표정이 잠깐 복잡해지다가 이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꾸며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뭐든 지들만 양심이고 정의라고 우겨대는 역겨운 에고이스트들! 억지는 관둬라. 김숙자 집에서 내가 직접 입수한 거다.”
“페이퍼 자체는 조작이 아니죠.”
연우가 환자복 오른쪽 주머니에서 네 등분으로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가로세로 20센티미터쯤 되는 정사각형 종이였다. 노르스름한 빛이 돌며 약간 거친 느낌이 살아있는 특이한 질감의 재생지. 종이 하단 귀퉁이에 지름 1센티미터쯤 되는 오각형 별모양의 실선이 보라색 스탬프로 찍혀 있고 그 안엔 아주 가는 펜으로 손수 쓴 페이지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앞뒷면에 각각 198, 197 이라고 쓴 아라비아 숫자가 독특하게 디자인된 문양처럼 별 속에 들어 있었다.
“제 친구 노트에서 찢어낸 거예요. 같죠? 지령문서랑?”
이지훈의 눈빛이 번뜩이며 연우가 들고 있는 종이를 휙 낚아챘다.
“지금 기자 상대로 장난질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나?”
“장난질이야말로 그쪽이 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만약 이 기자님에게 조작이나 허위 제보의 의도가 없었다면 전혀 엉뚱한 종이를 간첩사건의 증거라고 들이댄 J신문 톱 기자의 무식과 아집이 결정적인 문제겠군요. 그리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야 할 사람, 멀쩡한 사람 간첩 만드는 거 우습게 생각하는 이 기자님 같은 부류들 아닌가요? 하긴, 대한민국에 그런 명예훼손 건을 정의롭게 심판할 법정이 있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죠.”
종이를 든 이지훈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연우가 이지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참고로 말씀드릴게요. 그 종이의 페이지 넘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하긴 없는 증거도 만드는 판에 그런 게 이상했겠어요? 페이지 넘버,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하단에 적혀 있는 거예요. 오른쪽이 묶여진 노트거든요. 이 기자님이 지령문서라고 한 페이지는 제 친구 노트 맨 뒷장에서 찢어낸 거예요. 제 친구 아빠가 직접 만들어 준 노트고 제 친구가 손 글씨로 일일이 페이지를 매긴 노트라고요. 200페이지가 마지막 장이라고 그러더군요. 들고 계신 197페이지는 그러니까 ‘간첩지령문서’ 앞장인 셈이죠. 더 조사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적극 협조할게요. 참, 그 노트 주인 신상 조사도 물론 하시겠죠? ‘공신력 있는’ 정보기관에서 조사하시겠지만 수고를 미리 좀 덜어드릴게요. 그 친구 국적은 캐나다예요. 1993년생. 흥미가 생기죠?”
말을 마친 연우가 휴대폰을 꺼내 지오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클릭한 후 이지훈의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이지훈의 휴대폰이 길게 울렸다.
“확인해 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휠체어를 돌리던 연우가 잠깐 멈추더니 이지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지훈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
“이지훈 기자님. 오래 전에 산업 폐기물을 불법유출하는 악덕기업들의 비리를 추적한 기사 쓰신 적 있죠? 기업의 현장조직인 조폭 용역들 간의 관계까지 세밀하게 파헤친 기사여서 감동적으로 읽은 적 있어요. 소위 말하는 기자정신. 그거 없인 절대 쉬운 취재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휴대폰을 연 채 얼어붙어 있던 이지훈의 얼굴이 연우를 향해 다시 붙박였다. 뜨겁고도 서늘한 눈빛이 복잡하게 얽힌 채였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죠. 어떻게 변하느냐는 자기 선택의 문제겠죠.”
많은 말을 삼키고 연우가 천천히 휠체어의 바퀴를 다시 움직였다. 아주 거대한 무언가를 밀듯이.